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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로 읽는 동양고전

소깐 2008. 6. 15. 18:12
수필로 읽는 동양고전 69

五眼人
 
安秉煜


인간은 視角, 聽覺, 嗅覺, 味覺, 觸覺의 五官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알고 피부로 촉감을 느낀다.
五官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視角이다. 우리는 먼저 사물을 바로 보아야 한다. 詩人 괴테는 눈을 “感覺의 女王”이라고 말했다. 孟子는 눈을 “마음의 그림”이라고 했다. 눈은 바깥 세상을 보는 마음의 밝은 窓門이다.
漢字는 본다는 글자를 여러 가지고 만들었다. 見, 視, 看, 觀, 望, 睹 등.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되, 바로 보고, 아름답게 보고, 깊이 보고, 넓게 보고, 멀리 보아야 한다.
短見 짧게 보고 淺見 얕게 보고, 邪見 잘못보고, 管見좁게 보고, 偏見 편협하게 보고, 望見 虛妄하게 보는 것은 모두 잘못 보는 것이다.
눈이 있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다.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慧眼을 가지고 사물을 바로 보는 것을 眼目이 있다고 한다.
인간은 眼目이 있어야 한다. 佛敎에서는 사람의 눈은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肉眼과 天眼과 法眼과 慧眼과 佛眼이다. 이것이 불교의 五眼이다.
우리는 사물을 바로 보는 正觀人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總名한 인간, 지혜로운 사람,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다섯 가지의 눈을 자져야 한다.

첫째는 科學的인 눈이다.
科學者는 偏見과 獨斷과 妄想을 버리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明確하게 冷徹하게 본다. 우리는 편견과 先入觀念과 固定觀念에 사로잡혀 獨斷과 我執과 妄想에 빠지는 偏執人이 되지 않아야 한다.

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論語 子罕編)

제자들이 말하기를 孔子님은 다음 네 가지의 缺點을 버리셨다. 毋는 없을 무 字다. 意는 臆測이요, 必은 無理요, 固는 固執이요, 我는 에고이즘이다. 이 네 가지는 인간이 빠지기 쉬운 결점이다. 이 文章은 孔子의 合理的 精神을 가장 잘 표현했다.
우리는 옹졸하고 偏狹한 小我에 사로잡혀 我執과 我慾과 我慢(지나친 제자랑)과 我利(지나친 利己心)에 빠지는 小人으로 전락하기 쉽다.

둘째는 歷史的인 눈이다.
우리는 過去와 現在와 未來를 멀리 넓게 바라보는 遠視的 眼目을 가져야 한다. 現代人의 思考는 너무 近視的이다. 漢文에 登高望遠이라는 말이 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라. 멀리 바라보려면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한다. 낮은 곳에서는 멀리 볼 수 없다.
歷史란 무엇이냐. 國家의 興亡盛衰의 記錄이요, 人間의 榮枯浮沈의 파노라마다. 個人이건 團體건 國家건 興할 때에는 興할만한 要人과 理由가 있어서 흥하는 것이요, 亡할 때에는 망할만한 原因과 까닭이 있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다.
무릇 인간의 역사에는 因果業報의 冷嚴한 법칙이 지배한다. 善因善果요, 惡因惡果다. 善業善報요, 惡業惡報다. 사람은 자기가 뿌린 것을 거둔다. 역사는 결코 우연의 産物이 아니요, 僥倖의 결과가 아니다. 일찍이 中國의 위대한 領導者 孫文은 이렇게 말했다.

世界潮流 浩浩蕩蕩 順之者昌 逆之者亡.

세계역사의 큰 조류는 강한 힘을 가지고 滔滔히 흘러간다. 역사의 조류에 순응하는 자는 繁榮하고, 역사의 조류에 拒逆하는 자는 敗亡한다. 우리는 역사의 조류를 洞察하고 大觀하는 깊은 眼目을 가져야 한다.
漢文에서는 인간의 역사를 鑑(감)이라고 한다. 鑑은 ‘거울 감’字다. 古代 中國의 유명한 歷史家 司馬光이 쓴 『資治通鑑』과 司馬遷이 집필한 『史記』는 중국 政治家와 知識人의 必讀書다. 歷史冊은 智慧의 寶庫요, 國家經綸의 敎科書요, 修己治人의 古典이다.
우리는 역사책을 通해서 人類의 全體와 未來와 根本을 생각하는 遠視的 眼目을 배워야 한다.

셋째는 哲學的인 눈이다.
철학자의 눈은 어떤 눈이냐. 사물의 本質과 核心을 깊이 꿰뚫어 보는 洞察과 智慧의 눈이다. 우리는 皮相的 現象만 보지말고 사물의 根源과 核心을 보아야 한다. 獨逸의 위대한 哲人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思索하고 스스로 探究하고 제 발로 서라.

이것이 哲學的 思索의 基本姿勢다. 우리는 깊이 생각하는 自主的 思考人이 되어야 한다. 西洋에서 哲學者 필로소포스(philo-sophos)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피타고라스다. 그는 紀元前 6세기에 그리스에 살았던 유명한 數學者요, 哲學者요, 宗敎家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그것을 사람들에게 바로 가르쳐주는 일이다.

唯一命 唯一生. 우리는 天上天下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가지고 오직 한번뿐인 인생을 산다. 이 소중한 목숨, 이 尊貴한 人生을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그것을 바로 가르쳐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올바른 人生觀과 世界觀과 價値觀을 확립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목표요 使命이다.

넷째는 藝術的인 눈이다.
우리는 美를 발견하고, 美를 사랑하고, 美를 표현하고, 美를 創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은 위대한 創造力과 놀라운 表現力을 갖는다. 英國의 門戶 셰익스피어는 그의 名作 『햄릿』에서 主人公 햄릿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人間讚美의 메시지를 傳했다.

인간은 얼마나 위대한 作品인가. 理性은 얼마나 高貴하고 能力은 얼마나 無限한가. 그 形象과 動作은 얼마나 明確하고 훌륭한가. 行動은 마치 天使와 같고 理解力은 神과 같다. 世界의 美요 萬物의 令狀이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創造的 自己表現을 하는 것이다. 詩人은 言語로 자기를 表現하고, 畵家는 色彩와 그림으로 자기를 표현하고 舞踊家는 몸매와 律動으로 자기를 표현하고, 음악가는 노래와 樂器로 자기를 표현하고, 俳優는 表情과 動作으로 자기를 표현하고, 彫刻家는 形態로 자기를 表現하고, 雄辯家는 우리의 心琴을 울리는 말로 자기를 표현한다.
예술의 世界는 참으로 多彩多樣하다. 藝術의 生命은 美에 있다. 美는 우리를 恍惚하게 하고, 우리를 陶醉시키고, 우리에게 喜悅을 주고, 우리를 感動케 하고, 우리에게 安息을 주고, 우리에게 救援을 주고, 우리에게 힘과 希望을 준다.
예술이 없는 인생은 꽃이 없는 沙漠과 같다. 인간은 眞善美聖의 文化世界를 창조했다. 眞은 學問的 價値요, 善은 道德的 價値요, 聖은 宗敎的 價値요, 美는 藝術的 價値다. 이 네 가지의 文化價値 중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 가장 喜悅과 活氣와 재미와 平安함과 魅力을 주는 것은 藝術이다.

끝으로 宗敎的인 눈이다.
千秋萬代에 빛나는 人類의 영원한 스승이 세분 계시다. 年齡順으로 적으면 釋迦와 孔子와 그리스도다. 나는 지금부터 65년전 東京 유학시절 와세다대학에서 哲學을 공부할 때 책상 앞에 사진 한 장을 붙여 놓고 매일 바라보았다. 그것은 어느 畵家가 그린 想像圖의 사진이다. 釋迦와 孔子와 그리스도가 한 자리에 모여 서로 對話하는 그림이다.
구태여 이 모임에 이름을 붙인다면 三聖會談이라고 할까. 만일 三聖이 만나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나는 想像의 날개를 펴고 自由롭게 이리저리 생각하면서 즐거움을 느꼈다.
三聖은 聖의 경지에 도달한 人類의 슈퍼스타다. 聖의 ‘거룩할 성’ 字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最高至上의 境地를 우리는 聖이라고 한다. ‘聖’字는 귀 耳와 입 口와 임금 왕 字로 構成되어 있다. 성인은 먼저 귀로 듣는다. 良心의 소리, 역사의 소리, 眞理의 소리, 智慧의 소리, 백성의 소리, 하나님의 소리를 조용히 傾聽한다. 위대한 소리는 無聲이다. 聖人은 無誠意 소리를 들은 後에 百姓들에게 말씀으로 傳한다. 그런 일에 가장 뛰어난 존재(王)다.

聖人百世之師也(孟子 盡心下)

성인은 百歲에 걸쳐 백성을 印度하는ㅟ대한 스승이다. 孟子의 말이다. 莊子에 이런 名言이 있다.

至人無己, 神人無功, 聖人無名.(莊子 內篇 逍遙遊)

至人은 至極한 境地에 도달한 사람이다. 聖人과 같은 뜻이다. 至人은 無己다. 神人은 自己와 利己心을 완전히 超越한 사람이다. 神人無功. 神과 같은 높은 경지에 도달한 神人은 아무리 위대한 功績을 쌓아도 자기의 功을 내세우지 않는다. 聖人無名. 聖人은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여도 자기의 이름과 名譽를 자랑하지 않는다.
釋迦의 慈悲, 孔子의 仁, 그리스도의 사랑. 이것이 三聖의 大德이다.

1. 科學的인 눈을 가져라.
2. 歷史的인 눈을 가져라.
3. 哲學的인 눈을 가져라.
4. 藝術的인 눈을 가져라.
5. 宗敎的인 눈을 가져라.

五眼人. 이것이 새 時代, 새 社會가 요구하는 가장 理想的인 人間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