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보까

[스크랩] 파리 관광지 총정리

소깐 2008. 9. 15. 21:15

 

에펠탑

파리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구조물은 아무래도 에펠탑이 아닐까 싶다. 빛의 도시로 일컬어지는 파리의 가장 찬란한 빛의 향연도 바로 이 에펠탑에서 이루어지니 말이다. 파리 시내와 프랑스 대규모 행사 때마다 불꽃축제가 이루어지는 곳도 바로 여기다. 철근으로 된 구조물이 로맨틱한 파리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은근히 모순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센느 강 서쪽 강변의 드넓은 샹드 마르스 공원(Champs de Mars) 한쪽 끝에 우뚝 선 에펠탑은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1889년에 구스타프 에펠(Gustave Eiffel)이 건축한 것으로 19세기 최후의 가장 위대한 철골 구조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막상 이 탑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올라가자 당시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흉물스러운 고철더미라며 에펠탑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모파상의 경우 에펠탑이 보기 싫어 매일 에펠탑 안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는 아이러니한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기도 한다. 원래는 박람회가 끝난 직후 철거할 계획이었으나 탑의 아름다움과 실질적인 이용가치에 일찌감치 눈을 돌린 소수 진보세력의 보호로 다행히 오늘날까지 그 아름다움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지은 지 100년이 훨씬 지났지만 설계 이후 지금까지 에펠탑에서는 거의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 만큼 안전관리를 완벽하게 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파리를 상징하는 건축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전파를 송신하는 송신탑의 역할도 하고 있다.

에펠탑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은 샤이요 궁(Palais de Chaillot) 앞의 트로까데로 정원(Trocadéro)이며 샤이요 궁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장소는 반대로 이곳 에펠탑이라고 하니 건축물 설계에 있어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프랑스 사람들의 심미안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1, 2, 3층으로 구분된 에펠탑은 승강기를 이용하거나 걸어서 올라갈 수 있으며 건축 당시의 수압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짜릿한 느낌과 함께 파리의 모든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1층은 지상 57m 지점에 있으며 에펠탑의 이모저모를 알려주는 전시 공간이 있고 아름다운 파리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시네펠(Cineffel)이라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2층은 지상 115m 지점에 있으며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어 파리 시내는 물론 근교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다. 3층은 가장 전망이 좋은 곳으로 특히 야경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것으로 소문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건축법상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는 파리 시내의 거의 유일한 높은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펠탑은 멀리 라 데팡스(La Défense) 지역에서도 바로 보인다. 멀리서 보면 검정색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갈색인 에펠탑은 4년에 한 번씩 도색작업을 실시하여 언제나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파리는 건축법상 높은 건물을 함부로 짓지 못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날씨가 좋은 날에는 어느 곳에서도 에펠탑을 구경할 수 있으니 사진도 다양한 각도로 찍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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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

파리 서쪽 끝 부분에 세워진 거대한 개선문은 8구, 16구, 17구를 나누는 분수령이다. 개선문을 사이에 두고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 뻗어나간 12개의 거리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별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광장의 이름을 샤를 드 골‐에뜨왈(‘별’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이라고 붙였다. 1805년 오스테를리츠 전투에서의 승전기념으로 나폴레옹이 세우기 시작한 개선문은 수차례의 설계 변경과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인하여 건축이 지지부진하다가 1836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완성될 수 있었다. 전투에 참가한 부대원들에게 개선문을 통해 고국으로 귀향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나폴레옹 자신도 죽은 후에야 이 개선문 아래를 지날 수 있었다. 개선문은 고대 로마 시대에서 유래한 것으로 에뜨왈 광장의 개선문은 로마의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을 그대로 본떠 만든 것이다. 로마 시대 때 개선문을 세우고 그 아래로 행진할 수 있었던 사람은 정복자뿐이었다고 하며 황제와 그 부하들의 개선 행진은 그 당시 가장 영광스러운 행사였다고 한다. 개선문이 세워진 후 가장 영광스러운 개선 행진을 한 사람은 샤를 드골 장군으로 4년간의 독일 점령에서 벗어난 1945년 8월에 드골 장군은 이 개선문 아래로 천천히 행진을 하여 샹젤리제 대로로 들어섰다.

개선문은 높이가 50m, 좌우 길이는 45m며 아치 안쪽의 궁륭 길이는 29m에 달한다. 같은 시기에 세우기 시작한 뛸르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의 까루젤 개선문은 2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로마의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을 모방한 것으로 에뜨왈 개선문과 신도시 라 데팡스(La Défense)의 신 개선문과 함께 정확히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까루젤 개선문은 에뜨왈 개선문의 1/4크기밖에 되지 않는다. 개선문의 정면과 측면은 프랑스의 전쟁사를 일람할 수 있는 내용의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양쪽 기둥에 돋을새김으로 장식된 조각은 나폴레옹의 승리로 얻어낸 비엔나 협정과 지원군의 출정을 나타내고 있으며 바닥에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라 마르세이예즈(la Marseillaise)라고 알려진 지원군의 출정조각은 조각가 뤼드(Rude)의 작품으로 국가의 수호여신이 백성들을 이끌고 국가의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진군한다는 내용을 힘차게 표현한 걸작으로 손꼽힌다. 그 위의 ‘화상의 불꽃(La Flamme de Souvenir)’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목숨을 잃은 병사들을 위해 1923년 11월 11일 설치한 것으로 언제나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으며 주변에는 군사상의 중요한 사건을 연대순으로 기록해 두었다. 아치 안쪽으로 나 있는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가면 시원스런 전망이 펼쳐진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개선문을 중심으로 나 있는 12개의 거리가 마치 별처럼 보인다. 동쪽으로는 화려한 샹젤리제 대로(Avenue des Champs‐Elysées)가 아름다움을 뽐내며 펼쳐져 있고 서쪽 너머로는 신도시 라 데팡스의 초현대식 건물군이 한눈에 들어오며 그 끝으로 신 개선문이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전망대 바로 아래층에는 전시공간이 있어 개선문 건설과정을 묘사한 그림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고 기념품점도 있다. 또한 10분마다 개선문을 주제로 한 비디오 프로그램을 상영한다. 낮보다는 밤에 전망이 좋으며 특히 가로수를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장식한 겨울철의 야경이 가장 눈부시다. 해마다 11월 11일에는 승전 기념행사가 개선문에서 거행되며 이때는 전통적으로 프랑스 외인부대 대장이 개선문 아치 아래서 묵념을 올린다. 개선문의 출입구는 샹젤리제 대로에 있는 여행 안내소 건너편 지하도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무단횡단은 피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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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젤리제 대로

M Charles de Gaulle Étoile, Franklin D. Roosevelt, George V, Champs‐Elysées Clemenceau

 

프랑스인들에게 있어 샹젤리제 대로가 갖는 의미를 알고 싶다면 7월 14일의 혁명기념일이나 12월 31일 제야의 밤에 이 거리에 나가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인 샹젤리제는 행정구역상의 거리 이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화 현장으로 자리 매김한 지 오래다.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에 이르는 2.3㎞의 샹젤리제 대로는 파리에서 가장 넓은 도로로서 아름다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17세기 초반까지 이 지역은 별 볼일 없는 풀밭과 습지로 이루어진, 버려진 땅이었다. 그러다가 마리 드 메디치(Marie de Médicis)가 프랑스 왕가로 시집을 오게 되면서 이곳에 길을 닦기 시작해 18세기에 이르러 샹젤리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19세기 들어 대대적인 도시개발사업이 추진됨에 따라 샹젤리제에 호텔과 레스토랑이 들어서면서 파리 최고의 사교장으로 발전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만국박람회가 개최되어 그랑 팔레(Grand Palais), 샤이요 궁과 같은 기념 건축물이 샹젤리제 근처에 세워지면서 한층 유명한 거리가 되었다. 지금도 잘 다듬어진 가로수가 좌우에 빽빽이 심어져 있고 수많은 유명 브랜드 상점과 향수 숍, 카페, 브라스리가 고집스러운 전통과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을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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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 라셰즈 묘지

M Père Lachaise
08:00~18:00(여름), 08:00~17:30(겨울)

 

페르 라셰즈 묘지 파리에 있는 묘지들 가운데 가장 조경이 잘되어 있어 산책하기에도 좋고 유명인들이 가장 많이 묻혀있는 곳이 바로 페르 라셰즈다. 몽파르나스 묘지와 함께 나폴레옹이 공동묘지로 조성한 페르 라셰즈는 나지막하게 경사가 있고 키 큰 나무가 무덤 주위에 많이 심어져 있어 하나의 공원 같다. 워낙 유명한 사람들의 묘가 많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지도를 들고 한 곳 한 곳 찾아다니는 세심함이 필요하다. 묘지 입구에서 지도를 들고 판매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지만 주말이 아니라면 수위실에서 약도를 나누어주고 있으니 입구에서부터 사서 들어가는 우를 범하지 말 것.
빼곡히 들어찬 무덤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발길을 옮기다 보면 쇼팽(Chopin), 에디뜨 피아프(Édith Piaf), 몰리에르(Molière),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발자크(Balzac) 등 책이나 영화를 통해 알고 있는 사람들의 묘가 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무덤은 아무래도 그룹 도어스(Doors)의 리더 짐 모리슨(Jim Morrison)의 무덤. 60년대 말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짐 모리슨은 파리에서 약물과용으로 사망한 후 이곳에 묻혔는데 지금까지도 열성적인 팬들이 꽃과 대마초를 들고 찾아와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이곳에는 시든 꽃이 아닌 방금 사온 생생한 꽃들이 놓여 있다. 단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무덤 사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정면 사진을 찍기 어렵다는 것. 하지만 워낙 많은 이들이 그 주변에 모여 있기 때문에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심지어 그 장소에 너무 많은 인파가 몰려 묘지가 훼손될 것을 염려한 탓인지 경비원 한 명이 그 근처를 지키고 있기까지 하다.
시몬느 시뇨레의 필생의 연인이었던 이브 몽땅은 이곳에 그녀와 합장된 후 친자소송에 휘말려 유전자 감식을 위해 무덤이 다시 파헤쳐진 적도 있다. 특히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에는 여성들이 키스를 하고 갔음을 증명하는 립스틱 자국이 곳곳에 묻어있어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페르 라셰즈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1971년 파리 꼬뮌 때 처형당한 꼬뮌 전사들의 벽이다. 압제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147명의 시민들은 그들이 죽음을 당한 벽 아래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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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파르나스 묘지

파리의 묘지는 으스스하거나 공포스럽지 않고 고즈넉한 공원 같은 분위기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페르 라셰즈 묘지와 함께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묘지인 이곳은 몽파르나스 역 동쪽 라스파이 대로와 에드가 뀌네(Edgar Quinet) 대로를 끼고 자리 잡고 있다. 에밀 리샤르(Émile Richard) 거리를 사이에 두고 왼쪽의 정사각형 묘지와 오른쪽의 사다리꼴 묘지 두 개로 이루어져 있는 이 묘지는 19세기 초반에 나폴레옹의 지시에 따라 조성되었다. 그 전에는 사람이 죽으면 대부분 교구 내의 성당 묘지에 매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인구가 증가하고 성당 묘지도 점점 빈자리가 줄어들고 무엇보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시체가 부패하면서 발생하는 위생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파격적일 정도로 넓은 대지에 묘지를 조성하게 된 것이다.

몽파르나스 묘지는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Sartre)와 시몬느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의 묘를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 많이 잠들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에드가 뀌네(Edgar Quinet) 대로의 정문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가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합장된 묘지가 있고 묘비명도 나란히 씌어 있다. 그들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60여 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꽃송이가 놓여있고 볼펜과 편지들이 묘지 위를 가득 채우고 있어 그들이 전 세계 지성인들에게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 왼쪽으로는 ‘연인’으로 유명한 누보로망의 대표작가 마그리뜨 뒤라스(Margritte Duras)의 묘가 있다. 유명한 작가의 묘답지 않게 너무나도 평범하고 특별한 장식이 없어 그냥 지나치기 쉬우니 묘비명을 잘 살펴보도록 하자. 대중가요 가수이자 시민운동가로서도 유명한 참여운동가수 세르주 갱스부르(Serge Gainsbourg)의 묘지도 있다. 여배우 샤를로뜨 갱스부르(Charlotte Gainsbourg)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는 1980년대까지 프랑스를 대표하는 가수 겸 작곡가로서 저항정신이 담긴 가요를 많이 만들어 노래함으로써 프랑스 시민운동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곳의 또 한 명의 유명인은 다름 아닌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이다. 부조리 문학의 거두였던 베케트는 고향인 아일랜드를 떠나 파리에 정착하여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한 작가로 ‘고도를 기다리며’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프랑스인이 아니면서도 프랑스어로 글을 써 불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에밀 리샤르 거리를 건너 작은 묘지로 가면 브랑쿠지의 유명한 조각 ‘입맞춤(Le Baiser)’을 볼 수 있다. 묘지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세워진 이 작품은 다정히 끌어안고 입맞춤을 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극도로 단순하게 묘사한 걸작이다. 별로 크지 않은 조각이므로 그냥 지나치기 쉽다. 이 밖에 몽파르나스 묘지에는 ‘여자의 일생’을 쓴 기 드 모파상, ‘대머리 여가수’의 작가 외젠 이오네스코, 조각가 앙트완느 부르델, 괴도 루팡의 작가 모리스 르블랑, 작곡가인 생상 등이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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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 대성당

M Cité RER Saint Michel
08:00~18:45, 주말 ~19:15

 

시떼 섬(île de Cité)은 파리의 핵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지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파리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수세기에 걸쳐 파리는 센느 강 남북지역으로 넓게 팽창하였으나 여전히 ‘파리’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고딕의 첨탑이 높이 올라간 노트르담(Notre Dame) 대성당이다. 2,000여 년 전부터 갈리아인들과 로마인들이 바로 이곳에서 신을 섬기기 시작하였고, 크리스트교가 전파된 이후부터 이곳에 성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10세기 이전에는 세 개의 성당이 있었다. 그중 잔혹하기 그지없던 노르만인들이 물러간 다음에 지은 성당에 노트르담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지금의 대성당에서는 그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노트르담 대성당을 처음 짓기 시작한 때는 1163년으로 당시의 주교였던 모리스 드 쉴리가 총지휘를 담당하였다. 1345년에야 겨우 완공된 대성당은 그 오랜 건축기간에도 불구하고 쉴리 주교의 기본 설계, 즉 성당 서쪽에 있는 두 개의 로마네스크식 종탑과 화려하게 조각한 세 개의 정문은 변경되지 않았다. 동쪽의 높은 뾰족탑은 19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가 무려 90m에 이른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서쪽의 세 개의 정문에는 섬세하고 정교한 부조가 조각되어 있으며 그 위로 유태인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중세에 성당의 조각은 성서 역할을 대신했는데 당시 일반대중들은 글을 몰랐기 때문에 성서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당의 조각과 그림을 보면서 성서 안의 내용을 공부했던 것. 성당 내부는 건축시기에 따라 구분되어 있다. 입구 바로 안쪽은 1190~1220년 사이에 지어진 것이며 그 안쪽 회랑은 1180~1200년경에 조성되었다. 성당 중앙의 좌우로 나 있는 출입문은 1250년부터 20년 동안 새로 낸 것이며 제단 뒤쪽의 둥근 부분이 가장 먼저 지어졌다. 제단 부분은 1979년부터 10년간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한 것이며 제단 오른쪽의 보물전은 19세기에 덧대어졌다. 프랑스 대혁명 때 반 왕당파들이 대성당 정문의 유태 왕 조각을 파괴한 사건이 일어났으나 그 후 복원공사를 거쳐 원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당시 파괴된 조각상은 중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무엇보다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스테인드글라스에 눈길이 간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대표적인 프랑스 종교미술의 한 형태로 햇빛이 유리창을 투과할 때 실내에 쏟아지는 아름다운 색깔이 매우 인상적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중에서도 특히 서쪽과 남북 쪽에 있는 장미의 창이 유명하다. 또한 종탑 둘레에 새겨진 이무기상은 노트르담 대성당의 명물로서 악마를 막아준다는 상징적인 역할과 낙수받이라는 실용적인 역할을 겸하고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가장 화려한 모습을 자랑하는 곳은 성당의 동쪽, 즉 뒷면의 플라잉 버트레스다. 장 라비(Jean Ravy)라는 건축가가 설계한 이 플라잉 버트레스는 정면의 육중하고 엄숙한 분위기와는 대조되는 화려하고 날아갈 듯 섬세한 구조가 인상적이다. 플라잉 버트레스는 생 루이 섬 쪽에서 바라볼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1795년에서부터 1802년까지 대혁명의 와중에 대성당이 폐쇄된 기간을 제외하고는 이 성당은 프랑스의 역사적 인물들을 위한 미사가 집전된 것으로 유명하다. 앙리 4세가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나폴레옹이 황제 대관식을 이곳에서 거행하였고 20세기에 들어서서는 드골 장군과 미테랑 대통령의 장례식이 있었다. 지금도 노트르담 대성당은 파리 대교구의 주교좌성당으로서 국가의 주요 행사나 주요 인사들의 장례미사가 집전되는 곳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주요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보물전은 화려한 십자가와 성의, 성작 등의 성물과 옛 수도사들이 일일이 손으로 작성한 채색 장서와 필사본 등을 소장하고 있다.


노트르담 성당 광장 제로 포인트(Le Point du Zéro de Paris)
노트르담 성당 정문 앞 광장에 파리의 중심을 나타내는 제로 포인트가 있다. 바로 이곳에서 파리의 구가 시작되는 것이다. 제로 포인트를 반으로 잘라 서쪽은 1구, 동쪽은 4구가 된다. 잘 살피지 않으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작은 곳이므로 성당 앞의 바닥을 잘 훑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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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마르트르

M 피갈(Pigalle)역, 앙베르(Anvers)역에서 내려 조금 걸어 올라가거나 아베스(Abbesse) 역에서 내려 몽마르트르 올라가는 표지판(Butte Montmartre | 뷔뜨 몽마르트르)을 보고 갈 것. 일단 지하철역에서 내리면 항상 관광객이 많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걸어 올라가고 있는 길로 따라 오르는 것도 쉽게 찾을 수 있는 한 방법.
M 피갈(Pigalle)역, 앙베르(Anvers),아베스(Abbesse) 역

 

예술의 도시로 파리를 떠올릴 때 당신은 어디를 제일 먼저 떠올리는가. 물론 수많은 박물관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배고픈 무명의 화가가 어디엔가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작은 카페에서 담배를 피우며 인생을 논할 듯한 몽마르트르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만큼 몽마르트르는 단순한 지명이 아닌 ‘예술지역’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화가 뚤루즈‐로트렉(Toulouse‐Lautrec)과 위트릴로(Utrillo)가 남긴 그림 속의 몽마르트르는 낭만의 대명사로 여겨질 만큼 파리를 찾는 이들은 이곳 몽마르트르를 빼놓지 않고 들른다. 사시사철 관광객으로 들끓는 요즘에도 몽마르트르는 그 특유의 분위기를 잃지 않고 있으며 하얀색의 사크레 꾀르 대성당(La Basilique Du Sacré Coeur) 옆 광장에서는 오늘도 거리의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리기에 바쁘다. 몽마르트르라는 이름은 파리 최초의 순교자였던 생 드니(Saint Denis) 주교가 바로 이 언덕에서 참수되었던 데에서 유래한다. 몽(Mont)은 산, 언덕이라는 뜻이고 마르트르(Martre)는 순교자를 뜻하는 Martyrs(마르티르)에서 변형된 것이다. 즉 몽마르트르는 ‘순교자의 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 현재 수많은 예술작품과 그 근처의 퇴폐적인 숍과는 조금 모순 된 듯하기도 하다. 몽마르트르 언덕은 길이 끝나는 것 같으면 어느새 다른 길로 연결되는 꼬불꼬불한 골목으로 연결되어 있어 그 길을 따라 오르면서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파리 시내에는 이렇게 높게 경사진 곳이 드물기 때문에 천천히 걸어 오르면서 시내를 바라다보면 파리 곳곳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장점이 있다. 원래 이곳은 파리의 하층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빈민가였으나 1860년에 파리 시로 편입된 이후 가난한 예술가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예술인 구역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부유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기존의 보수적인 화단에서 소외되거나 자발적으로 자유로운 화단을 구성하려고 했던 예술자유주의자들은 이곳에서 현대미술을 열게 된 인상주의라는 새롭고 위대한 화풍을 이루면서 몽마르트르를 파리에서 가장 낭만적인 곳으로 가꾸었다. 지금도 몽마르트르에는 사크레 꾀르 성당 뒤쪽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풍차와 포도밭 등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몽마르트르 언덕(Butte Montmartre)
몽마르트르 언덕은 오스망 남작의 파리 도시계획이 실시된 이후 파리로 편입된 지역이기 때문에 개발의 손길을 비교적 타지 않고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원래 이곳의 언덕 꼭대기에는 로마 시대에 세운 군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크리스트교가 전파된 이후 3세기 중반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뤼떼시아 최초의 주교인 생 드니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참수를 당하면서 이곳의 지명이 생성되었다. 이후 이곳에는 수도원과 수녀원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종교적으로 상당히 융성한 곳으로 발전했다. 19세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빈민가에 불과했던 이곳에 보헤미안 기질을 지닌 화가들이 속물적이고 틀에 박힌 파리 시내를 버리고 모여들면서 점점 예술촌으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프랑스인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고흐나 모딜리아니 등 외국에서 들어온 예술가들도 몽마르트르에 둥지를 틀고 자유롭게 예술세계를 펼쳐나갔다.


카바레(Cabaret)와 퇴폐적인 피갈(Pigalle) 지역
카바레는 몽마르트르가 18구에, 피갈은 9구에 위치하고 있으나 10분 거리도 채 안 될 만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두 곳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내려오면 대로변을 따라 각종 기념품점과 싸구려 레스토랑들이 밀집해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곳곳에 이상야릇한 가게들이 많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카바레인 물랭 루주(Moulin‐Rouge)가 그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데 이 주변으로 성인용 에로영화를 틀어주는 비디오방이 죽 늘어서 있으며 사이사이에 섹스숍과 성인 클럽이 있다. 이 타락한(!)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겠다는 의지로 작은 수녀원이 거리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퇴폐적인 피갈 지역과 재미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거리 주변은 매춘과 폭력사고가 빈발하는 곳으로 심야에는 혼자 가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일행이 있더라도 널리 알려진 카바레가 아닌 작은 곳에서는 엄청나게 바가지를 쓸 수 있으니 반드시 주의해야 한다.

이곳!!! 특히 주의할 것
1. 사크레 꾀르 성당 주변에는 초상화를 그려주는 거리의 화가들이 모여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추억 삼아 그려보는 것도 좋지만 바가지요금을 조심할 것. 만약 초상화를 그리고 싶지 않다면 그들과의 대화는 삼가도록 할 것. 조금이라도 대꾸해 주었다간 발목 잡히기 십상.
2. 최근에는 관광객, 특히 동양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행운의 반지를 만들어주겠다며 무조건 팔목이나 손가락에 줄을 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모두 아무 생각 없이 손을 내민 관광객에게 줄을 걸어주고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 곳곳에서 실랑이가 벌어지지만 이들의 숫자가 워낙 많기 때문에 결국 돈을 낼 수밖에 없다. 이곳에는 관광객을 이용, 각종 바가지 행태가 일어나므로 주의할 것.
3. 피갈 지역의 호객행위에도 주의하라. 대부분 바가지요금을 매기거나 젊은 남성을 대상으로 퇴폐적인 쇼를 보기를 강요한다. 해가 진 이후 이곳을 지나는 것은 어지간하면 피하자.

몽마르트르 케이블카(Funicalaire de Montmartre;la ‘Grand Visite’)
사크레 꾀르 성당 바로 아래쪽으로 몽마르트르 언덕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가 있다. 맑은 날에는 파리 시내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인다. 파리 비지뜨 카드 적용.

몽마르트랭(Montmartrain)
몽마르트르 언덕을 오르내리는 이 작은 기차는 피갈 역에서 출발하여 사크레 꾀르 성당 앞까지 운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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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 미술관

메트로:13호선 바렌느(Varenne) 역 하차 | 버스:69, 82, 87, 92번
09:30~17:45(4월 1일~9월 30일), 09:30~16:45 (10월 1일~3월 31일, 하절기 17:15 마지막 입장/공원은 18:45에 닫음, 동절기 16:15 마지막 입장/공원은 17:00에 닫음)
월, 1월 1일, 5월 1일, 12월 25일
입장료:일반 6유로, 할인 4유로, 정원만 둘러볼 경우 1유로, 매월 첫째 일요일 무료

 

미술관 설립 배경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일컬어지는 오귀스뜨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이 남긴 작품은 다른 어느 조각가의 작품보다도 일반인들에게 친숙하다. 그러나 그가 세상의 인정을 받는 데는 조각가가 된 이후로도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청동시대(L'Âge d'Airain)’ 전시회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1880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예술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의 작품세계가 최정상에 오른 때는 60대이던 1900년대 초반이었다. 이 즈음에 그는 오랫동안 살아왔던 뫼동의 집을 떠나 빠리의 비롱 저택(Hôtel Biron)에 자리를 잡고 작품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왕성하게 수집했다. 1911년에 프랑스 정부는 이 집을 매입하여 로댕이 세상을 떠나던 1917년까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전폭 지원하였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 로댕 미술관으로 재개관했다. 15세기의 로코코 양식으로 지어진 이 저택은 현관 앞의 작은 장미정원과 저택 북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정원이 매우 인상적이다. 1993년에 보수공사를 하여 18세기풍의 원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특징
로댕의 작품은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있지만, 이 로댕 미술관처럼 그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곳은 없다. 500여 점에 이르는 전시작품 대부분은 작가가 직접 국가에 헌납한 것으로, 실내 전시실은 물론 정원과 별채에 전시되어 있다. ‘생각하는 사람’, ‘깔레의 시민들’을 비롯한 대작은 물론 ‘비밀’, ‘대성당’, ‘입맞춤’, ‘신의 메신저’와 같이 상징적이고 도발적인 소규모 작품들도 있다. 이외에 조각작업에 필요한 드로잉과 연인이자 제자였던 까미유 끌로델의 작품, 그리고 모네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등 로댕이 수집한 다른 화가들의 회화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
미술관 실내는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실은 그라운드 층의 구내 서점 왼쪽부터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으며 아래층에 9개, 위층에 8개의 전시실이 있다. 각 전시실은 주제 및 제작 스타일에 따라 분류된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로댕의 제자들이 모각한 작품도 관람할 수 있다. 순서대로 전시실을 관람하면 전체적으로 한 바퀴 돌 수 있는 구조이므로 특별한 관람순서는 없다.

주요 전시작품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앞에 아름다운 저택이 보이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화단 안쪽에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이 보인다. 잘 가꾸어진 정원수가 생각하는 사람의 고독과 벗하듯 조용하게 서 있다. ‘지옥의 문’ 시리즈 중 첫 번째로 제작된 이 작품은 단테가 자신의 창작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진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이제는 창조자의 상징이 되었다. 이 작품은 미술관이 아닌 거리나 광장에 설치된 최초의 청동조각품으로, 1906~1922년까지 빵떼옹 앞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지극한 단순미가 오히려 강렬한 느낌을 주는 ‘오노레 드 발작(Honoré de Balzac)’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가의 모습을 표현한 이 작품은 그러나 완성되었을 무렵 일반인들은 물론 작품을 의뢰한 사람도 극렬하게 분노하여 거부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제 이 작품의 놀라운 단순성과 표현의 강렬함은 20세기 현대조각의 선구자적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저택 왼쪽에는 ‘깔레의 시민들(Le Monument aux Bourgeois de Calais)’이란 걸작이 자리를 잡고 있다. 100년 전쟁 동안 영국인들에게 포위된 깔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여섯 명의 깔레 시민들을 기념하기 위해 깔레 시 당국이 로댕에게 의뢰한 작품이다. 

 1 전시실
실내로 들어서면 넓은 홀 안쪽으로 작품이 보이면서 본격적인 로댕의 세계로 접어들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1 전시실에는 ‘다이아나(Diane)’와 ‘꽃장식 모자를 쓴 소녀(Jeune Femme au Château Fleuri, 1865~1870)’ 등의 작고 아기자기한 소품이 전시되어 있다. 테라코타로 만들어진 ‘꽃장식 모자를 쓴 소녀’는 꽃장식을 한 모자를 쓰고 수줍은 듯한 표정을 한 소녀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표현한 것으로, 테라코타의 붉은색이 소녀의 발그스레해진 뺨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코 부러진 사나이(L'Homme au Nez Cass)’라는 재미난 제목의 작품은 로댕이 조각가로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를 무렵에 제작한 것으로 석고 모델을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보기좋게 퇴짜를 맞고 말았다. 우아함과 섬세함을 중시하던 살롱전 심사위원들의 눈에 이 작품은 지나치게 진보적인 것이었다.

2 전시실
규모가 작은 2 전시실에는 로댕이 벨기에에 체류할 때 제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대부분 작은 인물조각과 도자기 등의 소품으로, 다른 작품에 비해 유명도는 떨어진다. 프레보 소설의 주인공을 묘사한 ‘마농 레스꼬(Manon Lescaut)’와 ‘물들인 석고(Plâtre Teinté)’ 같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3 전시실
로댕을 유명하게 한 ‘청동시대(L'Âge d'Airain, 1875~1876)’는 3 전시실에 있다. 로댕이 실제인물로 주형을 만들었다는 소문까지 나올 정도로 인체묘사가 탁월한 이 작품은 로댕이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와 르네상스 문화에서 받은 감명을 그대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거친 듯하면서도 가식이 없는 젊은이의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해 냈는데 피렌체의 르네상스 조각에 견줄 수 있는 19세기의 유일한 작품이라고 한다. 벨기에 시절에 만들어졌으며 후에 많은 조각가들이 로댕의 세계를 흉내내기 위해 수없이 모방한 작품이기도 하다. 또 다른 걸작으로는 1870년의 보불전쟁 중 빠리 수호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라 데팡스(La Défense)’가 있다. 청동에 도금을 입혀 제작한 것으로, 1912년에 2배 크기로 확대 제작하였다. 남자가 엎드린 모습을 묘사한 작품은 ‘대지(La Terre)’이다.

4 전시실
창 너머로 아름다운 정원이 바라다보이는 4 전시실의 ‘신의 손(La Main de Dieu, 1916)’은 하얀 대리석의 거칠고 매끈한 질감을 동시에 표현한 작품으로 신의 손 안에서 몸을 둥글게 꼰 채 키스를 하려는 남녀를 묘사한 이 작품은 1896~1916년까지 여러 작품이 제작되었다. 평생 로댕의 모델로, 연인으로, 로댕의 아이를 낳은 여인으로 지내다가 죽기 보름 전에야 그와 겨우 결혼할 수 있었던 여인 ‘로즈 뵈레(Rose Beuret)’의 모습과 ‘대지와 달(La Terre et la lune)’이란 제목을 한 뒤틀린 남녀의 조각 등이 이 전시실의 또 다른 작품들이다. 로댕의 작품 중 가장 매혹적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입맞춤(Le Baiser, 1888~1898)’이다. 옆으로 틀고 앉은 남자와 그 앞에 거의 쓰러질 듯한 포즈로 앉은 여자의 열렬한 입맞춤을 묘사한 이 작품은 단테의 작품에 나오는 프란체스카와 파올로를 나타낸 것이다. ‘지옥의 문’ 시리즈의 일부로 제작된 이 작품은 평론가들은 물론 일반 대중들로부터도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전시실에는 ‘입맞춤’의 원형인 테라코타로 제작한 ‘파올로와 프란체스카(Paolo et Francesca), 1882’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5 전시실
전시공간이 가장 넓은 5 전시실에는 두 개의 손이 서로 만나는 모습을 한 ‘대성당(La Cathédrale, 1909)’이라는 작품도 있다. 로댕에게 있어 손은 다양한 작품의 주제가 되었는데, 릴케의 말에 따르자면 “로댕의 손은 작지만 신체의 일부로서가 아닌 독립적인 존재이며 스스로 걷고 생각하고 열광하고 범죄를 저지르며 마침내 안식에 빠져드는 존재”이다. ‘대성당(Cathédrale)’은 두 개의 오른손을 마주보게 표현하여 동일한 손가락이 겹쳐지지 않게 하였다. 텅 빈 공간에서 불쑥 위로 솟은 두 개의 손을 통해 로댕은 무척이나 사랑했던 고딕 대성당의 첨탑을 상징하고 있다. 대성당과 비슷한 구조를 한 작품 ‘비밀(Le Secret, 1909)’의 두 손은 대성당이 조화와 친밀감을 표시한 것과는 달리, 성작과 유사하게 생긴 어떤 물체를 사이에 두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6 전시실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의 작품을 전시한 곳이다. 로댕 미술관이 설립되기 전부터 로댕은 자신의 작품과 함께 끌로델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녀의 대표적인 작품인 ‘중년(L'Âge Mûr, 1898)’은 ‘노년, 중년, 청춘’ 연작의 일부로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함께 떠나는 남자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여인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청동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극적인 구성과 부드러우면서도 자연스런 모습 뒤에 감춰진 고뇌를 표현함으로써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주는 걸작이다. 물  흐르듯이 유연한 몸동작을 조각으로 표현해 낸 ‘왈츠(La Valse, 1895)’는 까미유 끌로델만의 독특한 개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비스듬히 서서 춤을 추는 남녀의 모습은 과감하게도 의도적으로 균형을 이루지 않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이곳에 있는 또 하나의 걸작은 ‘사쿤탈라(Sakountala)’라고도 불렸던 ‘베르툼네와 포모네(Vertumne et Pomone, 1905)’라는 작품으로,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하며, 작가의 그지없이 섬세한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로댕의 ‘입맞춤’과 자주 비견되는 작품으로 두 작가의 작품세계를 비교해 보는 훌륭한 소재가 되고 있다. 그러나 로댕의 작품보다 더욱 강렬한 인체 근육의 표현과 극적인 분위기 등은 끌로델의 열정이 얼마나 폭발적인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7~9 전시실
이브의 방이라고도 불리는 7 전시실에는 1881년에 제작한 ‘이브(Eve)’와 끌로델의 작품과 제목이 같은 ‘파도(La Vague)’ 등이 있으며, 여인의 초상을 대리석으로 조각한 작품이 전시된 8 전시실을 지나면 뛰어난 스케치 작가로서의 로댕을 만날 수 있는 9 전시실이 나온다. 연필선 하나만으로 사람의 모든 감정을 그대로 담아낸 듯한 드로잉에는 조각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역동적인 생명력이 보다 자유롭고 힘차게 표현되어 있다. 로댕이 남긴 스케치는 무려 8,000여 점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라 이 전시실은 3개월에 한 번씩 작품을 바꾸어 전시하고 있다.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 중에는 사진을 모델로 하여 로댕이 직접 그린 ‘자화상(Autoportrait)’이 있는데, 형형하게 빛나는 눈빛이 연필선만으로도 충분히 표현되어 있다.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에는 ‘환상, 이카루스의 누이(L'Illusion, soeur d'Icare)’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다. 날개가 부러져 아래로 추락하는 여인의 모습을 묘사한 이 작품은 로댕이 끌로델과 헤어지던 무렵에 제작한 것으로, 당시의 괴로운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10 전시실
1층 전시실 중에서는 ‘지옥의 문(La Porte de l'Enfer, 1880)’이 있는 10 전시실이 가장 중요한 곳이다. ‘지옥의 문’은 세 번째로 제작한 초기 모형으로, 단테의 신곡에서 주제를 따온 것이다. 피렌체의 르네상스에 깊은 감명을 받은 로댕은 이 작품을 통하여 지옥이라는 극적인 소재를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로 해석하고 열정과 폭력과 절망을 힘차게 표현하였다. 피렌체 대성당 맞은편에 있는 세례성당의 천국의 문에서 힌트를 얻었지만 기본적인 틀만 천국의 문과 유사할 뿐 표현양식과 문에 묘사된 인물들의 표현에는 로댕 특유의 스타일이 표출되고 있다. 땅에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높이 쳐든 남자의 모습을 청동으로 표현한 ‘탕아(L'Enfant Prodigue)’는 인체의 근육을 완벽에 가깝게 나타내어 비탄에 빠진 인간의 고뇌를 드러낸 작품이다. 불끈 주먹을 쥔 왼손과 활짝 편 오른손의 대비와 하늘을 향해 외치듯 벌린 입에서는 금방이라도 고함소리가 터져나올 듯하다.

11 전시실
이 전시실에서는 ‘아이리스, 신들의 메신저(Iris, Messagère des Dieux)’라는 충격적인 작품을 접하게 된다. 한쪽 다리는 발끝만 땅에 닿은 채 오른쪽 손이 옆으로 벌린 오른쪽 발을 꽉 잡고 엉거주춤 앉은 모습의 여인 토르소로 로댕의 작품 중 가장 대담하다. 불편해 보이는 자세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가장 자유롭게 구사하여 신의 세계를 묘사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이 몸을 앞으로 완전히 구부린 채 엎드린 ‘다나이드(Danaïde)’는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퍼부어야 할 저주받은 운명의 젊은 여인을 나타낸 작품이다. 로댕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히는데 가냘프고 섬세한 여인의 등과 한올 한올 느껴지는 머리카락이 놀랄 만큼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너무나도 매끄럽게 표현된 등은 쓰다듬어 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섬세하고 아름답다. 이 작품 앞에서는 언제나 조각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열심히 스케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리석으로 조각한 ‘구름 속의 파올라와 프란체스카(Paola et Francesca dans les nuages)’도 관람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작품이다. 거칠고 강건한 원석과 매끄럽기 그지없는 인체조각은 언뜻 보면 미완성 조각 작품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저주받은 연인들의 필사적인 몸부림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이다. 가장 전형적인 로댕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목부터 극적인 ‘나는 아름답다(Je suis belle)’는 ‘지옥의 문’ 연작 중 일부로 제작된 작품이다. 고대 그리스 신을 떠올리게 하는 근육질의 남자가 몸을 잔뜩 웅크린 여인을 안아 올린 자세를 묘사했는데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가감 없이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제목은 보들레르의 시 ‘악의 꽃’에서 따왔다.

12 전시실
‘깔레의 시민들(Le Monument aux Les Bourgeois de Calais)’에 나오는 인물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분리되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정원에 있는 청동작품은 여러 명의 인물을 통해 집단적 희생을 느낄 수 있는 반면, 이곳에 있는 작품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적 고뇌가 느껴진다. 특히 나체와 두상, 손 등 세부적 측면을 정밀하게 관찰하여 제작한 인물상이 모여 빚어내는 독특한 개성을 놓치지 말자. ‘깔레의 시민들’ 중 일부로 제작된 ‘삐에르 드 비상, 거대한 두상(Pierre de Wissant, tête colossale)’은 생각하는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서게 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은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혀 흐트러짐 없는 긴장된 근육과 고뇌에 찬 듯한 인물의 표정이 압권이다.

13~14 전시실
13 전시실에는 로댕의 대리석 작품들을 위해 초기에 제작된 석고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다. 14 전시실은 모네, 반 고흐의 회화를 중심으로 한 로댕의 회화 컬렉션을 전시하고 있다. 유난히 인상파 작품을 좋아한 로댕은 자유로운 영혼을 표현한 고흐의 작품을 특히 아꼈다고 한다. ‘추수하는 사람들(Les Moissonneurs)’과 ‘아를르의 육교가 있는 풍경(Vue du Viaduc à Arles)’과 더불어 로댕의 캐리커처와 르느와르의 초상화 등이 이 전시실을 메우고 있다.

15 전시실
빅또르 위고와 발작을 주제로 한 습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로댕이 가장 존경한 문필가인 빅또르 위고를 기념하기 위한 ‘빅또르 위고에 바치는 존경(Apothéose de Victor Hugo)’이라는 작품과 발작의 모습을 누드로 표현한 작품 ‘발작:누드 연습, C 타입(Balzac : Etude de nu, type C)’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마지막 두 전시실은 각각 ‘로미오와 줄리엣(Roméo et Juliette)’과 ‘프쉬케‐봄(Psyché Printemps)’과 같이 소설이나 신화의 내용을 주제로 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나 다른 전시실에 비해 중요도는 떨어진다. 대리석 조각의 세계를 보다 더 광범위하게 알아보려면 본관 옆에 새로 지어진 대리석 전시실로 가보자. 유리벽으로 막아놓아 작품을 가까이에서 볼 수는 없지만 로댕의 세계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부대시설 & 주변까페
구내 서점은 첫 전시실 바로 앞에 있다. 다양한 도판과 해설서, 로댕 전기 등이 구비되어 있으며 작품을 담은 포스터도 종류가 많다. 정원 오른쪽에 예쁘장한 테라스 까페가 있다.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기에 아주 좋다. 4월부터 9월까지는 09:30~18:30, 10월부터 3월까지는 09:30~16:30에 문을 연다. 렉스포 까페(L'Expo Café / 주소 : 47, rue Bourgogne)는 로댕 미술관 앞 오른쪽 골목에 있는 작고 아담한 까페이다. 실내장식이 무척 아름답고 세련되었으며, 테이블과 의자 등 가구가 예쁘면서도 편안하다. 소규모 갤러리도 겸하고 있어 무명작가들의 전시공간으로 제공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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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미술관

메트로:4호선 끌뤼니‐라 소르본(Cluny‐La Sorbonne) 역 하차 | 버스:21, 27, 38, 63, 85, 86, 87번
09:15~17:45(입장권 판매는 17:15까지)
화, 1월 1일, 5월 1일, 12월 25일
입장료:일반 8유로, 할인 6유로, 18세 미만 무료
패스:적용 | 사진촬영:플래시 없이 가능

 

 

미술관 설립 배경
생 미셸 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세 블록 내려가면 왼쪽으로 고풍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작고 우아한 미술관을 만나게 된다. 빠리의 역사를 설명해 주는 귀중한 고대, 중세 유물을 전시하는 중세미술관으로, 원래는 로마 시대 욕장이 있던 곳이었으며, 후에 끌뤼니 수도원이 세워진 곳이다. 1843년에 이곳에 미술관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갈로 로마 시대의 유산인 공동 욕장의 잔해와 알렉상드르 솜므라르(Alexandre Sommerard)가 수집한 귀중한 예술품이 보관되어 있던 끌뤼니 수도원을 통합하여 마침내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미술관을 개관하였다. 이곳에 수도원을 세운 사람은 부르고뉴의 끌뤼니 수도원장이었던 자끄 당브와즈(Jacques d'Amboise)로, 1500년에 빠리의 끌뤼니회 수도사들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전반적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을 사용하여 지어졌지만 기도실은 천장이 높은 플랑브와이양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로마네스크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 건축물은 보존상태가 완벽하여 건축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이 미술관은 시대에 따라 고대 뤼떼시아(빠리의 옛이름)의 유물과 로마 식민지시대의 유물, 스테인드글라스를 비롯한 중세 종교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당시의 흔적으로는 높이 15m인 둥근 천장의 냉탕이 있다.

특징
12세기 전후의 성인들 조각상을 비롯하여 중세의 스테인드글라스, 가구, 성물, 장식품 등이 연대기별로 구분 전시되어 있으며, 기둥과 석조 조각을 비롯한 서기 1~3세기의 갈리아 로마 유적이 함께 전시되어 고대와 중세의 문화를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미술관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뭐니뭐니 해도 15세기 말에 플랑드르 지방에서 제작된 섬세하고도 화려한 태피스트리 연작인 ‘귀부인과 일각수(La Dame à la Licorne)’이다. 

전시실
그라운드 층과 1층에 모두 23개의 전시실이 배치되어 있다. 연대순으로 작품이 전시되어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 특색 있는 작품만을 중점적으로 전시한 곳도 있다. 그라운드 층의 1~6 전시실과 1층의 17~23 전시실은 15세기에 고딕식으로 지어진 수도원 건물에 있으며, 그라운드 층의 7~12 전시실과 1층의 13~16 전시실은 1~3세기경 지어진 고대 로마 시대 공동 욕장이 있던 자리에 있다. 고대 건축물 위에 수도원을 지은 것이므로 건물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고 연결통로만 따라가면 모든 전시실을 둘러볼 수 있다. 구내 서점이 있는 1 전시실을 지나 2 전시실부터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므로 차례대로 관람하면 된다.

주요 전시작품
1~2 전시실
서점이 자리잡은 1 전시실 안쪽으로 난 작은 문을 들어서면 어둑한 2 전시실이 나온다. 작품관람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곳에는 중세 가구와 태피스트리가 주로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16세기 초반에 플랑드르 지방에서 제작된 포도수확 풍경을 담은 태피스트리가 눈길을 끈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아랍의 카펫 직조기술을 배우게 된 유럽은 실용적인 면보다는 장식적인 면을 강조한 태피스트리를 제작하여 바닥에 까는 대신 벽에 걸게 되었다. 그 밖에 16세기 제단장식과 14~15세기 조각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3~4 전시실
4~6세기 기독교 로마의 영향을 받은 이집트 문명인 콥트의 섬유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정교한 자수작품과 의복이 눈길을 끄는데, 1,5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작품이다. 직조가 섬세하고 정교하며 다양한 색상으로 처리한 문양이 특징이다. 4 전시실은 벽의 세 면을 태피스트리가 장식하고 있다. ‘성무일과(La Vie Seigneurial)’를 주제로 한 6개의 태피스트리와 16세기 초반의 장원생활을 묘사한 태피스트리가 있다. 한쪽에는 15세기 베네치아에서 제작된 화려한 법랑 접시와 물병 등 생활용품이 전시되어 있어 중세의 장식미술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5~6 전시실
15세기 영국 미술품인 ‘노팅햄의 알라바스타(Les Albâtres de Nottingham)’ 시리즈가 있다. 성인, 예언자, 예수의 모습을 석고에 조각한 것으로, 오른쪽 벽면은 신약성서의 내용을 부조로 조각하였다.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접할 수 없는 것이 중세의 영국 미술인데, 이곳에 있는 작품을 통해 유럽 대륙의 화려하고 표현이 풍부한 조각과는 달리 소박하고 절제된 영국 중세 조각의 세계를 간단하게나마 엿볼 수 있다. 6 전시실은 전체가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이 지어지던 12~13세기에 제작된 스테인드글라스뿐만 아니라 특히 아름다운 푸른빛으로 유명한 생뜨 샤뺄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생‐드니 대성당, 루앙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부분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7~8전시실
13세기의 ‘삐에르 드 몽트뢰이 문(Porte de Pierre de Montreuil)’이 자리잡고 있다. 중세 건축 및 장식미술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것으로 섬세한 조각이 인상적이다. 8 전시실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출토된 성서를 주제로 한 조각 작품을 모아놓은 곳이다. 12세기에 제작된 ‘생뜨 안느 문(Porte de Ste. Anne)’과 13세기에 만들어진 ‘유다 왕의 머리(La Tête de Judah)’ 및 ‘아담(Adam)’ 등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있다.

10 전시실
생‐제르맹‐데 프레 성당에서 출토된 기둥머리(캐피탈)가 전시되어 있는데, 11세기에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4~12세기의 상아 공예품과 같은 장식미술품과 12세기에 생‐드니 성당에서 출토된 두상, 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조각된 그리스도상, 13세기의 프라토 동정녀와 성 요한 등의 성인 조각이 있으며, 여러 겹으로 접을 수 있는 제단화(Retable) 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제단 장식에는 십자가, 성모 승천, 성 그레고리오의 미사, 생 마르땡의 자선, 부활, 생 마르땡의 죽음과 같은 내용이 묘사되어 있어 당시 글을 몰랐던 일반 민중들에게 성서의 역할을 대신했다.

13 전시실
12~13세기의 종교 조각품과 16세기의 태피스트리 작품이 전시된 11~12 전시실을 돌아보고 나면 1층으로 올라가게 된다. 13 전시실은 중세미술관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한 ‘귀부인과 일각수(La Dame à la Licorne)’ 시리즈가 전시된 곳이다. 일일이 손으로 짠 태피스트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섬세하게 제작된 이 작품은 언뜻 보면 대형 회화작품을 떠올릴 정도로 색상이 선명하고 원근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15세기에 플랑드르에서 제작된 이 작품은 모두 여섯 개로 이루어져 있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 인간의 감각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작품에는 귀부인과 일각수와의 수수께끼 같은 관계가 표현되어 있으며, 가장 큰 여섯 번째 작품은 이 시리즈의 결말을 나타내는 귀부인의 자유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염소의 몸, 말의 머리, 긴 뿔, 엄청난 속도와 힘을 지닌 유니콘은 처녀의 도움을 받아야 잡을 수 있다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이는 중세의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로서 종교, 즉 성스러움과 퇴폐성을 동시에 상징하며 때로는 그리스도나 연인을 상징하기도 한다. 초승달은 이슬람과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을 나타낸다. ‘귀부인과 일각수’ 연작의 밑그림은 빠리에서, 태피스트리는 플랑드르에서 제작된 것으로 재료는 모직과 비단실이다. 원형 전시실 왼쪽에 걸려 있는 태피스트리부터 오른쪽으로 순서대로 관람하면 마치 한 편의 동화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미각
사자와 유니콘이 귀부인의 주위를 돌고 있는데, 귀부인은 왼손에 앉은 앵무새를 바라보며 다른 손으로는 시녀가 들고 있는 바구니에서 사탕을 하나 집는다. 강아지는 귀부인의 행동을 지켜보며, 개구쟁이 원숭이는 귀부인의 발치에 앉아 머루같이 생긴 달콤한 과일을 집어먹는다.
 
청각
귀부인은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으며, 사자와 일각수는 주위를 맴돌며 음악을 듣는다. 

시각 일각수가 귀부인의 무릎 위에 다정하게 앞발을 올려놓고 귀부인이 들고 있는 거울을 들여다본다.

후각 귀부인은 꽃다발을 만들고, 원숭이는 그 옆의 바구니에 든 장미 향기를 들이마신다. 

촉각
우아하게 차려입은 귀부인이 한 손으로 유니콘의 뿔을 쓰다듬고 한 손으로는 깃발을 들고 있다. 

마지막 작품에는 ‘내 유일한 욕망에게(A Mon Seul Désir)’라는 글자가 씌어진 천막 앞에 귀부인이 서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앞 그림에서 달고 있던 화려한 목걸이를 도로 보석함에 넣고 있는데, 이는 유혹을 거절한다는 행동이다. 자신의 유일한 욕망, 즉 무절제한 감각으로 인하여 야기된 열정에 빠지기를 거부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13 전시실 관람을 마치고 나면 중세미술관의 주요한 작품은 거의 모두 둘러본 것이나 다름없다. 그 이후의 전시실에는 모두 15~20세기까지의 종교를 주제로 한 장식미술품과 태피스트리, 양피지로 만든 고서, 조각, 제단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14~15 전시실
16세기 초반 플랑드르 지방의 도시 안트베르펜의 제단 장식작품이 있다. 14세기에 제작된 제단 장식에는 성모마리아의 생애가 묘사되어 있으며, 15세기 타라스콘의 피에타가 있다. 이 밖에 대형 태피스트리가 전시되어 있어 르네상스 직전의 장식미술을 살펴볼 수 있다. 중세의 서책이 전시된 복도 전시실인 15 전시실에는 중세 수도사들이 일일이 손으로 제작한 필사본과 청동 공예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삐까르디 복도(Couloir de Picardie)’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16~17 전시실
비교적 규모가 큰 16 전시실에는 7세기에 만들어진 서고트 족의 왕관 같은 독특한 작품과 14세기에 제작된 황금 장미가 눈길을 끈다. 특히 이곳에는 프랑스 중부의 리모쥬 지방에서 12~13세기에 만들어진 칠보공예품이 있는데, 화려하고 아름다운 공예품의 수준이 현대 공예품에 견주어 전혀 손색이 없는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다. 칠보로 만든 대표적인 공예품으로 십자가와 성체 감실을 비롯한 성물과 보석 등이 있다. 17 전시실은 14~150세기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데, 특히 1500년경 끌뤼니 수도원을 장식했던 ‘십자가를 진 예수상(Portement de Croix)’이라는 작품이 장엄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또한 상아로 만든 장식미술품과 함께 15세기 스페인에 있던 아랍인들이 제작한 무데하르 양식의 도자기 타일이 독특한 아라베스크 문양의 아름다움을 선보인다.

18 전시실
15세기 보베의 생 뤼시앵 성당의 성가대석이 그대로 옮겨져 있으며, 전시실 가운데는 ‘시간의 책(Livres du Temps)’이라는 12~15세기에 제작된 거대한 서책이 전시되어 있다. ‘시간의 책’에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악보도 실려 있지만 1년 365일 성서의 가르침에 따른 묵상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사람들의 신앙심을 돈독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대형 백과사전보다도 큰 크기에 화려한 원색의 삽화가 곁들여진, 굵은 글씨로 씌어진 책의 내용은 이해할 수 없지만 한장 한장 넘기다 보면 신비스러운 중세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21~23 전시실
성모의 생애를 묘사한 그림과 조각, 태피스트리와 수태고지를 알리는 천사 및 16세기 초반 북부 네덜란드의 세례자 요한의 동상이 전시되어 있으며, 중세 귀족 집안의 제단 장식과 무기, 갑옷 등을 두루 관람할 수 있다.

부대시설 & 주변까페
박테리아 골목으로 불리는 생 미셸 대로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수없이 많은 크레프, 케밥 식당이 손님을 부르고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의 식당과 패스트푸드점이 많이 몰려 있어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기에 편리하다. 르 비스트로 트렁뜨(Le Bistro 30 / 주소 : 32, rue Saint Séverin)는 프랑스다운, 라틴 구역 내에서도 가장 프랑스다운 비스트로이다. 실내장식이 아주 인상적이다. 가장 맛있는 요리는 우리나라 사람들 입맛에도 맞는 부르고뉴식 쇠고기 요리(Boeuf bourguignon)이다. 갈비찜처럼 쇠고기를 켜켜로 쌓아 소스를 부어 찐 후 그 위에 밤, 버섯 등으로 장식한 요리다. 빵떼옹을 바라보면서 오른쪽에 몰려 있는 수많은 까페 중에서 가장 특이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라 귀에즈(La Gueuze / 주소 : 19, rue Soufflot)에서는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종류의 맥주를 맛볼 수 있다. 특히 다른 곳에서는 쉽사리 접하기 어려운 꽉(Kwak)이라는 맥주는 플라스크와 모래시계를 합쳐서 만든 듯한 특이한 글라스에 담겨 나오는데, 손잡이로 사용되는 나무 용기와 어우러져 재미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미술관 뒤쪽으로 나가 생 자끄 거리와 생 제르맹 대로가 만나는 모서리에 자리잡은 바 위트르(Bar à Huitres / 주소 : 33, rue Saint Jacques)는 굴 요리 전문 체인 레스토랑이다. 신선한 생굴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메뉴가 ?20부터 있다.

주변 볼거리
프랑스를 대표하는 소르본 대학(La Sorbonne / 주소 : 47, rue des Écoles)은 현재 ‘빠리 4대학’으로 불리고 있으며, 빵떼옹과 중세미술관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소르본이란 이름은 이 대학의 창시자인 로베르 드 소르봉(Robert de Sorbon)이라는 성직자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강의실과 복도, 강당은 소르본 출신의 위대한 인물들의 초상화와 미술사적으로 상당한 가치를 지닌 명화로 장식되어 마치 박물관을 연상하게 한다. 대학 정면에 당당하게 서 있는 소르본 성당(Église de la Sorbonne)의 화려한 돔 지붕이 영광스러웠던 지난날을 상징하고 있다. 뤽상부르 공원과 마주보고 있는 수플로 거리 끝에 웅장하게 세워진 빵떼옹(Panthéon / 주소 : Place du Panthéon)은 수플로가 설계한 거대한 돔이 인상적인, 빠리의 대표적 기념 건물이다. 네오클래식 양식으로 지은 이 빵떼옹은 높이가 무려 83m로, 당시 빠리 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거대한 기둥이 늘어서 있는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놀라우리만큼 넓은 실내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에서 1855년에 레옹 푸꼬(Léon Foucault)가 높이 67m의 대형 추를 설치해 지구의 자전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바 있다. 개관시간은 10:00~18:30(동절기), 10:00~18:00(하절기), 입장료는 일반 ?8, 할인 ?5, 18세 미만은 무료이며, 박물관 패스를 사용할 수 있다. 미술관 앞의 생 미셸 대로(Boulevard Saint Michel)는 불미슈(Boul'Mich)라는 별명이 있지만 간단히 생 미셸이라고만 해도 누구나 아는 유명한 대로이다. 생 미셸 대로는 샹젤리제, 몽빠르나스 대로와 더불어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거리이다. 특히 제3세계 영화나 독립영화 등 유행에 따르기보다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내용의 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극장이 많이 있다. 생 미셸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재즈 클럽 르 꺄보 들 라 위셰뜨(Le Caveau de la Huchette / 주소 : 5, rue de la Huchette)는 오랜 전통과 더불어 유명한 재즈 뮤지션을 배출한 것으로 아주 유명하다. 요일마다 입장료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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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

메트로 : 12호선 솔페리노(Solférino) 역 하차 RER C선 뮈제 오르세(Musée d'Orsay) 역 하차
09:30~18:00(목요일 21:45까지), 입장권 판매는 17:00까지(목요일 21:00까지)
월, 1월 1일, 5월 1일, 12월 25일
입장료:일반 8유로, 18~30세, 매일 16:15부터, 목요일은 18:00부터 6유로
패스:적용 | 사진촬영:플래시 없이 가능

미술관 설립 배경
뛸르리 정원 아래쪽으로 난 강변을 따라 서쪽으로 걷다 보면 강 건너편 좌안에 우아하고 아름다운 대형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강물에 빛나는 야경이 특히 멋진 이 건물은 루브르 미술관, 뽕삐두 센터와 더불어 빠리의 3대 미술관으로 손꼽히는 오르세 미술관이다. 1900년 7월 14일 세계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완공한 이곳은 원래는 기차역이었다. 오르세 역은 1871년 빠리 꼬뮌 때 불타 없어진 옛 오르세 궁전 자리에 세워졌다. 국립미술학교의 교수였던 빅또르 랄루(Victor Laloux)가 루브르 미술관과 뛸르리와 조화를 이루는 것은 물론, 당시로서는 최첨단 소재였던 강철과 유리를 사용하여 건물을 설계하였다. 오르세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은 1977년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이 이곳을 근·현대미술관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면서부터였다. 역량 있는 건축가들을 초빙하여 수년 간에 걸친 재건축 작업 끝에 1986년 12월 1일 오르세 미술관으로 다시 세상과 만나게 된 이 미술관은 소장 작품뿐만 아니라 건물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눈을 끄는 매력적인 예술공간이다.

특징
오르세 미술관에는 1814~1914년까지 서양 미술계를 지배했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전시 중인 작품들은 이전에 루브르 미술관과 죄드뽐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던 작품을 이전한 것이다. 시대적으로는 루브르 미술관과 뽕삐두 센터를 잇는 역할을 하며, 작품 면에서는 일반인들이 가장 친숙하게 여기는 인상파 작품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 이탈리아 건축가 아울렌티(Aulenti)가 설계한 아름다운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높은 천장이 눈에 들어오고 옛날에 플랫폼이었던 조각 전시실이 눈길을 끈다. 미술관은 모두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규모에 비해 작품수가 많고 또 대부분 일반인들에게도 매우 익숙한 작품이기 때문에 관람시간을 여유 있게 잡는 것이 좋다. 전시작품은 크게 회화, 조각, 장식미술품으로 구분된다. 로댕, 부르델, 마이욜 등 프랑스 근·현대 조각계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조각 세계와 엑또르 기마르를 위시한 아르누보 작가들의 독특한 장식미술 세계도 오르세 미술관에서 두루 관람할 수 있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 미술관 컬렉션을 대표하는 것은 회화작품이다.

전시실
그라운드 층(레‐드‐쇼쎄)‐2층‐1층의 순으로 작품이 연대별로 배치되어 있다. 입구로 들어서 왼쪽과 오른쪽에 마련된 전시실의 작품을 먼저 관람한 후 복도와 뒤쪽 전시실을 구경한 다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우리 식으로는 3층)으로 올라가면 인상파와 후기인상파의 작품 전시실이 나온다. 그런 다음 계단을 이용하거나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여 1층으로 내려와 나머지 작품을 관람하면 오르세 미술관의 이모저모를 모두 훑어보게 된다. 시간이 없어 반 고흐를 비롯한 유명 작가들의 작품만 둘러보고 싶다면 일단 2층으로 먼저 올라가 주요 전시실을 둘러본 다음 그라운드 층으로 내려와 복도 양쪽에 전시된 유명 작품을 관람하면 된다. 그라운드 층의 한가운데는 옛날에 철도가 지나던 곳으로, 지금은 1840~1875년 사이에 제작된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 양 옆의 전시실에는 1870년을 전후한 작가들, 즉 앵그르(Ingres), 들라크르와(Delacroix), 드가(Degas), 마네(Manet) 등의 작품이 있다. 이 중 가장 인상적인 전시실은 ‘이삭 줍기’와 ‘만종’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프랑수아 밀레(François Millet)의 작품이 있는 6 전시실이다. 비교적 공간이 넓은 7 전시실에는 꾸르베(Courbet)가 그린 ‘세상의 근원’이라는 파격적인 작품이 있고, 18 전시실에는 모네와 르느와르의 1870년대 이전 작품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중점적으로 전시된 공간이 나온다. 발레리나의 모습과 일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에드가 드가(Edgar Degas / 31 전시실), ‘피리 부는 소년’의 마네(Manet / 31 전시실), 아름다운 여인들을 파스텔조로 표현한 르느와르(Renoir / 34 전시실), 풍경화의 일인자 피사로(Pissaro)와 시슬레(Sisley / 32 전시실), 예술에 대한 열정을 삭이지 못해 결국 불행하게 자살을 택했던, 시대를 앞서간 천재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 35 전시실) 등의 작품을 모두 관람할 수 있다. 특히 많은 관람객이 몰리는 반 고흐 전시실에는 ‘닥터 가셰의 초상’, ‘오베르 쉬르 와즈의 성당’, ‘자화상’ 같은 걸작이 전시되어 있다. 44 전시실에는 고흐와 함께 활동했던 고갱(Gauguin)의 작품이 있고, 신인상파의 창시자로 알려진 쇠라(Seurat)의 작품은 45 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47 전시실에는 몽마르트르의 불행한 여인들을 화폭에 옮긴 뚤루즈‐로트렉(Toulouse‐Lautrec)의 작품이 있다. 2층에서 계단을 따라 한 층 내려오면 장식미술과 20세기 초반의 작품이 주로 전시된 1층 전시실에 다다르게 된다. 중앙 테라스에는 앙뜨완느 부르델을 비롯한 현대 조각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양 옆의 전시실은 시대와 사조에 따른 회화 및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자연주의(55, 58 전시실), 상징주의(59, 60 전시실) 화파의 회화와 더불어 발로똥(Vallotton / 70 전시실)과 보나르(Bonnard / 72 전시실)의 작품이 이곳에 있다. 61~66 전시실은 아르누보 계열의 장식미술품이 전시된 곳으로, 특이한 형태를 지닌 가구와 도자기 등의 장식품이 있다. 특히 64 전시실은 아르누보를 탄생시킨 낭시 화파의 작품이 전시된 곳으로, 빠리의 메트로 표지판을 디자인한 기마르(Guimard)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주요 전시작품
1 전시실
19세기 중반에 주로 활동했던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의 작품세계가 펼쳐진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세례를 동시에 받은 앵그르는 인간과 자연의 구체적인 미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곡선과 간접조명을 받은 듯한 발그스름한 대상 표현이 그의 특기였는데, 작품 속에 등장한 인물들의 아름다움은 거의 완벽에 가까워서 너무 관념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대표작으로는 아름다운 소녀가 물동이를 쏟아 붓고 있는 모습을 그린 ‘샘(La Source)’이라는 작품인데, 무려 36년에 걸쳐 제작한 것이다. 비너스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여주인공은 조각 같은 완벽한 몸매와 꿈꾸는 듯한 눈동자를 하고 있는데 인물은 밝게, 배경은 어둡게 처리한 데서 바로크 양식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이 그림은 후에 피카소, 르네 마그리뜨와 같은 현대 화가들뿐 아니라 수많은 작가들과 시인들에게도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2 전시실
정적이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앵그르와 거의 동시대에 활동했던 들라크르와(Eugène Delacroix)는 미술사조상으로는 그와 같은 그룹에 속하지만 작풍은 완연히 다르다. 루브르에 있는 그의 대표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와 같이 들라크르와는 그림을 통해 당대의 현실에 대한 발언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모로코에서 여울을 건너다(Passage d'un Gué au Maroc)’는 붉은색, 노란색, 갈색 등 난색 계열을 사용하여 강한 터치로 표현한 작품이다. 19세기 중·후반에 들라크르와는 오리엔탈리즘에 강하게 경도된 적이 있는데, 이때 남긴 그의 작품은 대부분 불꽃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으며 이 작품도 그 범주에 속한다.

3 전시실
서양 화가들에게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이 된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 그중에서도 비너스이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이후 수많은 화가들이 세월의 차이를 넘어 끊임없이 비너스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렸는데, 오르세에도 예외 없이 한 작품이 있다. 꺄바넬(Alexandre Cabanel)의 ‘비너스의 탄생(La Naissance de Vénus)’은 다른 비너스들과는 달리 파도 위에 누워서 탄생의 순간을 맞이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완벽한 구도와 너무나도 조심스럽게 표현한 인물들, 꿈속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투명하리만큼 푸른 물의 세계 등 고전회화가 갖는 미덕을 두루 갖추고 있지만 현대 비평가들로부터는 엄청난 비난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5 전시실
산업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던 19세기 중반,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간 농민들의 향수를 달래준 밀레(Jean‐François Millet)는 바르비종 화파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언제나 이름없는, 그러나 세상의 뿌리가 되어준 건강한 농민들이었다. 사실 ‘만종(Angélus)’만큼 단순한 그림도 없다. 해질 무렵 들판에서 일하던 부부가 삼종기도를 올리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이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의 정서에 가까이 와 닿았던 것은 이 그림이 인간의 원초적인 회귀본능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지런한 민중들의 건강한 모습을 담은 밀레의 또 다른 작품으로는 ‘이삭 줍기’를 빼놓을 수 없다. 추수가 끝난 가을 들판에서 아낙네들이 허리를 구부려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는 이 그림은 목가적인 전원풍경화 정도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은 당시 프랑스 농촌의 질곡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말하자면 의식화된 민중회화라고 할 수 있다.

7 전시실
19세기의 사실주의 세계는 꾸르베(Gustave Courbet)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 인물들의 사실적인 표현이 특징인 꾸르베의 대표작으로는 ‘오르낭의 장례식(Un Enterrement à Ornans)’이 있다. 1850년 살롱전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 작품은 보수적 평론가들의 진노를 샀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도 사실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죽음, 장례식, 묘지와 같은 소재는 낭만적인 것으로 여겨져 뭔가 드라마틱한 비극이 표현되어야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되었는데 꾸르베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제각각 서로 다른 표정을 하고 있다. 이보다 5년 후에 나온 ‘화가의 아뜰리에(L'Atelier du Peinture)’는 인물화, 정물화, 동물화가 하나의 화폭에 구현된 대작으로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하여 그린 극히 사실주의적인 작품이다. 이 밖에도 발표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관람객들이 충격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세상의 근원(L'Origine du Monde)’이라는 작품이 같은 방에 전시되어 있다.

14 전시실
검정색 연미복에 높은 중절모, 거기다 지팡이를 들고 다니던 멋쟁이 신사 마네(Edouard Manet)가 ‘올랭피아(Olympia)’라는 제목의 그림을 살롱전에 출품했을 때 빠리 화단으로부터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다. 벌거벗은 여자가 당당한 표정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여신만이 가능한 것인데, 올랭피아는 여신도 요정도 아닌 빠리의 고급 매춘부였던 것이다. 혁명 이후 새로운 상류계층으로 성장한 부유한 시민계급 사람들은 겉으로는 점잖고 도덕자인 척하면서 한편으로는 고급 매춘부들과 퇴폐적인 애정행각에 탐닉하기에 바빴다고 한다. 이런 이중성을 비웃듯 마네는 가면을 쓴 시민계급 사내들을 가까이에서 접하는 매춘부를 비너스의 포즈를 빌려 표현한 것이다. 마네의 작품 중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것은 ‘피리 부는 소년(Le Fifre)’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 또한 살롱전에서 거부당했다. ‘올랭피아’처럼 도발적이지도 풍자적이지도 않은, 그저 순진하게 생긴 소년이 피리를 부는 모습을 그린 얌전한 이 작품은 전통을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원근법이었다. 이 작품은 아무런 배경처리 없이 그저 소년의 모습만 그려져 있기 때문에 살롱전에서 탈락했던 것이다.

31 전시실
마네(Edouard Manet)의 작품 중 가장 먼저 관람한 작품은 ‘올랭피아’였지만 대표작은 역시 ‘풀밭 위의 점심(Le Déjeuner sur l'Herbe)’라고 할 수 있다. 1863년 살롱전에 모습을 드러내 진보적 작가나 평론가들로부터는 찬사를 받았지만 그 외의 사람들한테서는 악의적인 증오를 샀던 작품이다. 녹음이 우거진 숲 속에서 각자 다른 방향을 향하고 앉아 있는 그림 속의 인물들은 일행인 것 같기도 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 그린 초상화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을 준다. 드가(Edgar Degas)는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조각가로서도 상당한 명성을 누렸다. 초창기의 드가의 작품은 리얼리즘 계열의 인물화가 대부분이다.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했던 드가는 여유로운 부르주아지의 모습과 함께 도시 노동자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때로는 코믹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같은 전시실에 있는 ‘푸른 옷을 입은 발레리나들(Danseuses Bleues)’은 초기 작품에 비해 추상성이 강조된 것으로 녹색과 노란색, 붉은색의 점을 빛 대신 활용한 배경과 푸른 무용복이 뿜어내는 강한 빛이 구체적인 공간감각을 대신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인물의 형태를 만들어 가는 것은 선으로 그린 윤곽이 아니라 조금씩 안쪽으로 좁혀 들어가는 물감의 질감이다. 이 밖에 드가의 조각 작품으로 청동에 진짜 옷을 입혀 만든 ‘14세의 어린 발레리나(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가 있다. 

32 전시실
인상파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작가라면 모네(Claude Monet)를 빼놓을 수 없다. 인상파라는 이름도 그의 작품 ‘인상‐해돋이(Impression‐Soleil levant)’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모네는 한 가지 대상을 시간의 추이에 따라 반복적으로 그린 작가로 유명하다. 고전적인 풍경화가들이 한 장소에서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주변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과는 달리 모네에게는 순간적인 빛의 효과를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의미있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개성은 ‘생 라자르 역(La Gare Saint Lazare)’이라는 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인상파 화가, 특히 풍경화가를 논할 때 모네와 더불어 빠지지 않는 사람이 피사로(Camille Pissaro)이다. 모네와 마찬가지로 빛의 효과를 표현하는 데 주력하였지만, 피사로의 작품은 대상을 비교적 구체적이고도 선명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모네의 작품에 비해 부드럽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붉은 지붕(Les Toits Rouges / 32 전시실)’은 빠리 교외의 어느 작은 마을의 가을 풍경을 그린 것으로 잎사귀가 떨어져 나간 나무 뒤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 주택의 붉은 지붕이 가을 햇살을 받아 더욱 붉게 빛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특히 나무에 가려진 집들의 하얀 외벽과 뾰족한 붉은 지붕은 빛의 효과로 표현했는데도 선명하게 그 경계선이 드러나 빛과 그림자를 탁월하게 이용할 줄 알았던 피사로의 산뜻한 붓놀림을 짐작할 수 있다.

33 전시실
인상파 화가들이 대체로 풍경에 천착했던 것과는 달리 르느와르(Pierre‐Auguste Renoir)는 평생 아름답고 행복한 젊은 여인들을 비롯한 인물화에 치중한 작가였다. ‘물랭 드 라 걀레뜨의 무도회(Le Bal du Moulin de la Galette)’는 빠리 북쪽의 몽마르트르 언덕 주변 걀레뜨 풍차 광장에서 벌어진 야외무도회를 그린 작품으로, 수많은 인물들이 표출해 내는 다양한 표정과 몸 동작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구체적인 듯하면서도 물감으로 뭉개버린 듯한 과감한 색감처리는 르느와르의 작품이 아니면 찾아볼 수 없는 색다른 개성을 자랑한다. 르느와르는 또한 초상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절친한 친구였던 모네를 모델로 한 ‘끌로드 모네 초상(Claude Monet)’은 같은 예술의 길을 걷는 동료에 대한 우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34 전시실
이 전시실 또한 르느와르와 모네의 작품을 주로 전시하고 있는데, 두 작가의 후기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La Série des Cathédrales de Rouen)’은 한 가지 대상을 놓고 빛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끈질기게 그렸던 모네의 개성을 찾아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고딕 건축의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섬세하고 화려하며 엄정한 장식이 특징인 루앙 대성당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모네의 눈에 어떻게 비쳐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이 시기의 작품으로 ‘푸른 수련(Nymphéas Bleus)’이 있으나 ‘수련’ 시리즈에 관한 한 오랑쥬리 미술관과 마르모땅‐끌로드 모네 미술관을 따라갈 곳은 없다. 1880년대 이후 르느와르의 작품은 점점 규모가 커져간다. 이전의 인물화가 정적이고 규모가 작은 초상화 범주에 드는 것이라면,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은 ‘도시에서의 (Danse à la Ville)’과 같이 보다 역동적이고 화려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이 작품은 르느와르가 점점 더 선의 묘사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드러내는데, 단순한 구도를 사용하는 대신 날카롭고 정교한 대상의 묘사로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분위기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과 나란히 걸려 있는 ‘시골에서의 춤(Danse à la Campagne)’도 마찬가지 분위기인데 여기서는 여주인공의 표정이 있는 그대로 묘사되어 마치 무도회의 한 쌍을 스냅 사진으로 촬영한 것 같다.

35 전시실과 41 전시실
시대를 앞서갔던 불행한 천재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열정이 전해지는 이 전시실에는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냈던 빠리 교외의 오베르‐쉬르‐오와즈에서 그렸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이 지역의 개업의이며 가난한 화가들의 친구였던 미술품 수집가 닥터 가셰가 수집한 가셰 컬렉션은 오르세 미술관의 존재 이유 중 가장 큰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먼저 관람객들의 시선을 끄는 작품은 ‘화가의 초상(Portrait de l'Artiste / 41 전시실)’이라는 제목의 자화상이다. 바닷물을 연상케 하는 푸른색을 배경으로 고뇌에 찬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은 이 작품은 귀를 자른 초상화와 함께 고흐가 남긴 가장 유명한 초상화이다.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가셰를 모델로 그린 ‘뽈 가셰 박사의 초상(Le Docteur Paul Gachet)’은 반 고흐 인물화의 개성이 한껏 드러난 작품이다. 이 전시실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오베르‐쉬르‐오와즈 성당(L'Église d'Auvers‐sur‐Oise)’이다. 평화로운 작은 마을의 언덕에 자리잡은 유서 깊은 고딕식 성당의 외형을 사정없이 뒤틀어버린 반 고흐의 과감한 묘사와 불길한 인상을 주는, 낮게 내려앉은 짙은 푸른색의 하늘, 거친 붓터치로 표현된 성당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당시 심장이 터질 듯한 고뇌에 빠져 있던 반 고흐의 정신세계를 극명하게 표출해 준다. 이 작품은 후에 표현주의 화가들, 특히 노르웨이의 화가인 뭉크에게 큰 영향을 미쳐 결국 서양 현대미술의 한 기둥이 되었다. 이보다 따스한 느낌을 주는 그림으로 ‘반 고흐의 방(La Chambre de Van Gogh / 35 전시실)’이 있다. 고갱과 함께 프로방스 지방의 아를르에 있을 때 그린 이 작품은 비교적 따뜻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36 전시실
순수 회화라기보다는 광고 포스터에 가까운 그림을 즐겨 그렸던 뚤루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은 몽마르트르 언덕 아래 환락가의 눈물과 한숨, 노래와 웃음, 춤과 술을 주제로 한 그림을 주로 남겼다. ‘물랭 루즈의 무용수(La Danse au Moulin Rouge)’는 어느 캬바레에서 춤을 추는 무희와 그녀를 바라보는 익명의 관객들을 그린 작품으로, 애매하고 추상적인 공간 속에서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드러내 보이는 삶의 모습을 가감 없이 표현하고 있다. 2층 전시실을 지나다 보면 오르세 미술관의 시계가 있다. 까페 바로 옆에 있는 이 시계의 중앙은 투명하게 되어 있어 바깥 풍경이 아름답게 보이는데, 특히 저 멀리 몽마르트르 언덕의 사끄레‐꾀르 대성당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37 전시실
유화, 수채화, 소묘뿐만 아니라 파스텔화에도 두루 능했던 드가의 파스텔화 작품이 전시된 이 전시실은 다른 전시실에 비해 어두운 편인데, 그 이유는 파스텔이 빛에 약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목욕(Le Tub)’, ‘세탁부(Les Blanchisseuses)’ 등 여성을 소재로 한 그림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발레리나를 주제로 한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이 두 작품은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여성들의 현실적인 모습을 소재로 한 점이 특징이다. 다림질을 하다가 크게 하품하는 여자의 모습을 그린 ‘세탁부’는 많은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한다.

42 전시실
앙리 루소(Henri Rousseau)의 ‘뱀을 유혹하는 여인(La Charmeuse de Serpents)’은 고갱과 야수파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열대지방인 듯한 어느 공간의 한 밤, 검고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나부의 실루엣은 날카롭게 치켜뜬 눈빛으로 인해 극적인 효과를 풍긴다. 질긴 듯한 질감이 느껴지는 나무와 풀, 붉은 몸체의 물새, 공상과학 소설에 등장할 법한 달빛은 작품의 공간을 비현실적인 신화의 세계로 여기게 만든다. 이 작품은 후에 입체파 회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특히 피카소가 아주 좋아했던 작품이라고 한다.

44 전시실
타히티의 이국적인 모습을 주로 그린 고갱(Paul Gauguin)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후기인상파 작가이다. ‘타히티의 여인들(Femmes de Tahiti)’은 검은 피부에 풍만한 몸집을 한 타히티의 두 소녀를 모델로 그린 작품으로, 남태평양의 이국적이고 강렬한 정취가 느껴지면서도 왠지 불안한 눈빛을 띤 여인의 얼굴에서 식민지인의 두려움이 전해진다. 고갱이 타히티를 사랑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친 것은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그는 식민본국의 지배자였고 그러한 관점이 여러 작품에 남아 있음은 이방인의 눈에는 약간의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독특한 구도와 과감한 색상처리, 디테일은 생략하고 주제만을 크게 강조한 그의 스타일은 나중에 야수파 작품의 바탕이 되는 큰 의미를 갖는다.

45 전시실
다양한 스타일을 추구한 인상파 중에서도 쇠라(Georges Seurat)와 시냑(Paul Signac)이 주축이 된 점묘화파는 전혀 새로운 양식의 인상파 회화를 선보였다. 버슬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옆모습이 인상적인 쇠라의 대표작 ‘아니에르의 수욕(Une Baignade, Asnière)’은 아쉽게도 오르세가 아닌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고, 이곳에는 대신 ‘서커스(La Cirque / 45 전시실)’가 관람객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이 작품은 쇠라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작으로 붉은색과 노랑색의 점이 강해지며 차차 화폭 아래로 내려오면서 특이한 공간감각을 연출한다. 1층으로 내려오면 조각과 장식미술품이 두루 전시된 공간이 펼쳐진다. 조각의 상징이라고 할 만한 오귀스뜨 로댕(Auguste Rodin)의 ‘지옥의 문(La Porte de l'Enfer)’을 비롯하여 그의 연인이자 제자인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의 대표작인 ‘중년(L'Âge Mûr)’, 부르델(Antoine Bourdelle)의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Héraklès Archer)’ 등 걸작의 반열에 드는 수많은 조각 작품들을 두루 감상할 수 있다. 또한 마이욜(Aristide Maillol)의 ‘지중해(Méditerranée)’는 대리석으로 조각된 것으로서, 마이욜 미술관에 있는 청동작품과는 또 다른 멋을 느낄 수 있다.

부대시설 & 주변 까페
 관람이 끝난 후 2층에 자리잡은 까페 데 조뙤르(Café des Hauteurs)에서 창 밖으로 펼쳐진 멋진 풍경을 감상하며 차 한 잔 마시는 여유를 누려보자. 1층에는 레스토랑이 있어 오랜 시간 동안 작품관람을 한 후에 느끼는 허기를 달랠 수 있다. 오르세 미술관 바로 앞에 있는 프랑스식 브라스리인, 레 되 뮈제(Les Deux Musées / 주소 : 79, rue de Lille)는 오르세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이 미술관 관람을 마친 후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 때문에 언제나 붐빈다. 손님들 대부분이 단체 관광객이라 음식 맛이 나쁜 편은 아니지만 큰 특징은 없다. 셰 마리우스(Chez Marius / 주소 : 5, rue de Bourgogne, 전화:01 44 18 71 26) 는 국회의사당 뒤 빨레 부르봉 앞 거리에 있는 작고 예쁜 프랑스식 레스토랑. 생선 요리가 전문.

주변 볼거리
꽁꼬르드 다리(Pont de la Concorde) 바로 아래에 있는 프랑스 국회의사당(Assemblée Nationale / 주소 : 33 Quai d'Orsay)은 꽁꼬르드 광장을 사이에 두고 마들렌 성당과 마주보고 있다. 루이 14세가 딸인 부르봉 공작 부인에게 지어준 궁전으로, 원래 이름은 부르봉 궁전(Palais Bourbon)이다. 국회의사당 뒤편의 빨레 부르봉 광장(Place du Palais Bourbon) 주변으로는 프랑스 국방부, 교육부 등 각종 국가기관과 한국대사관을 비롯한 각국 대사관이 포진해 있어 명실공히 프랑스의 정치 1번지라 할 수 있다. 일반 자유입장은 불가하다. 오르세 미술관과 국회의사당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로댕 미술관에 이르는 일대를 포부르 생‐제르맹(Faubourg Saint‐Germain)이라고 한다. 이곳은 세느 강 남단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18세기의 건축물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곳곳에 자리잡은 미술관/박물관을 중심으로 고급 쇼핑가와 골동품 상가가 형성되어 있으며, 대저택이 그 어느 지역보다도 많이 분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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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_02

중세로 접어들자 고대의 자유로운 인체 조각은 사라지고 대신 4세기 이후 로마의 종교가 된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종교적이고, 어두운 분위기의 조각들이 등장한다. 중세 조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필립 포의 무덤(Le Tombeau de Philippe Pot / 리슐리외 2관 10 전시실)’이 있다. 검은 두건을 쓰고 옆구리에 방패를 단 채 고개를 푹 숙인, 수도자로 보이는 여덟 명의 사람이 죽은 사람을 단 위에 누인 채 무덤가로 메고 가는 장면을 묘사한 이 작품은 그로테스크하고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금방 관람객들의 눈길을 끈다. 중세가 거의 끝나가던 15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시토 수도회 내의 성당에 있던 것을 박물관으로 옮겨왔는데, 인물의 표정을 표현함으로써 감정을 이입시켰던 고대 조각과는 달리 인물의 움직임과 분위기로 감정을 전달한다. 여덟 명의 수도사는 사람, 특히 귀족이 죽었을 때 망자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데, 옆에 찬 방패는 죽은 이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중세 이후 서양 미술계를 지배한 장르는 회화였다. 13세기경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회화는 유럽 전역에서 다양한 스타일을 동시다발적으로 발전시키며 각기 독특한 전통을 이루었는데, 염료의 발달과 함께 조각에 비해 제작이 쉽다는 장점 때문에 이후의 서양 미술은 회화를 빼고서는 얘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루브르에 소장된 회화작품은 거의 6,000여 점에 달하며, 13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회화 전시실을 연대별로 훑어보기만 해도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중세 프랑스 회화는 14세기경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였으며, 초기에는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르네상스 이후부터는 빠른 속도로 앞서 나가기 시작하여 태양왕 루이 14세를 전후한 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세계 미술의 최선봉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훌륭한 작품들을 아낌없이 구입한 역대 왕과 귀족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절대왕정의 모순이 만들어낸 대혁명으로 인하여 왕조는 사라지게 되었다. 루브르에서 가장 오래된 프랑스 회화작품으로 알려진 ‘선왕(善王) 장의 초상(Portrait de Jean le Bon / 리슐리외 3관 1 전시실)’은 1350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작자 미상이다. 도화지 크기만한 작은 나무판에 왕의 옆모습을 그린 이 작품에서는 이탈리아 화파, 특히 시에나 화파의 흔적이 엿보이는데, 당시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장은 발르와 왕가의 두 번째 왕으로 재임시 무척이나 고생을 많이 한 인물이다. 이 초상화는 유럽 최초로 옆모습을 초상화로 그린 작품이기도 하다. 이보다 100여 년 후에 그려진 작품인 ‘빌뇌브‐레‐자비뇽의 피에타(La Piéta de Villeneuve‐lès‐Avignon / 리슐리외 3관 4 전시실)’는 중세 프로방스 지방의 미술 경향을 잘 나타내준다. 이탈리아와의 국경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인지 프로방스는 중세부터 이탈리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여기에 프랑스의 전통적인 스타일이 혼합되어 독특한 아비뇽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그림 한복판에 슬픔에 잠긴 성모마리아가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축 늘어진 몸을 무릎에 안고 있고, 그 주변으로 마리아 막달레나와 성 요한, 그리고 기도하는 성직자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각각의 인물이 주는 엄정하고 정형화된 표정과 자세가 프랑스 조각의 전통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마리아 막달레나가 입은 붉은색의 옷과 밝은 갈색으로 표현된 뒷배경 등은 이탈리아 미술의 흔적이며, 선명한 윤곽과 세밀한 묘사는 아비뇽 화파만의 독특한 개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작자 미상인 ‘가브리엘 데스트레스와 그녀의 언니(Gabrielle d'Estrées et une de ses Soeurs / 리슐리외 3관 10 전시실)’는 16세기 말엽의 프랑스 회화의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 인물의 크기를 달리함으로써 원근법을 쓰지 않고서도 공간 감각을 표현하였다. 오른쪽 여인은 가브리엘 데스트레스로 앙리 4세의 정부였다. 언니가 가브리엘의 유방을 잡은 이유는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는데, 실제로 가브리엘은 이 그림이 그려진 1594년에 앙리 4세의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가브리엘이 왼손에 잡고 있는 반지가 바로 왕과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빛과 그림자를 적절히 사용하여 표현한 두 여인의 섬세하고도 매끈한 누드는 조각을 연상시키며, 커튼과 욕조를 감싼 천자락의 주름은 부드럽다기보다 정형화된 느낌이 강하게 든다. 드라마틱한 구성과 강렬한 표현으로 17세기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 니꼴라 뿌생(Nicolas Poussin)은 프랑스인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정착하여 로마의 산 루카 아카데미 교장을 지내는 등 특이한 이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고전 미술과 문학에 바탕을 둔 품격 있는 회화를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성서중에서도 구약성서의 내용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은데, ‘사비네 여인들의 유괴(L'Abduction des Sabines / 리슐리외 3관 14 전시실)’는 스펙터클한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킬 만큼 역동감이 넘치는 작품이다. 니꼴라 뿌생은 또한 사계절을 주제로 한 연작을 남겼는데, 당시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을 위하여 제작한 것이다. 장르는 풍경화이지만 고전주의자였던 뿌생은 자신이 살았던 당대의 사계가 아닌 고전시대의 사계절을 나타내었는데, 네 작품 모두 성서 속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주제로 하고 있다. 첫 작품인 ‘봄(Le Printemps / 16 전시실)’은 어느 화창한 봄날 아침의 숲 속을 묘사한 것이다. 사실적으로 묘사된 푸른 숲과 푸른 하늘, 흰 구름 가운데 자그마하게 보이는 남녀 한 쌍의 모습은 아담과 이브를 나타낸다. 니꼴라 뿌생의 손을 빌려 탄생한 태초의 인간과 아직 원죄를 저지르기 전의 지상낙원의 모습은 상쾌하고 따스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을 풍긴다. ‘여름(L'Été)’은 한여름 낮의 보리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가난한 농민들을 묘사한 것이다. 이 작품은 죄를 지은 인간이 교회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진정한 기독교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림 왼쪽에 우뚝 서 있는 거목과 그 뒤로 펼쳐진 보리밭, 그리고 일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선지자에게 무릎을 꿇는 등 인물의 다양한 형상이 묘사되어 있다. ‘가을(L'Automne)’은 수확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늦은 오후 완전히 익은 포도를 따는 사람들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 속의 포도는 약속의 땅을 상징한다. ‘겨울(L'Hiver)’은 앞의 세 작품에 비해 다소 비극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즉 신의 노여움으로 40일간 비가 내려 대홍수로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노아와 그 일가만 살아남았다는 구약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프랑스의 지배자로는 나폴레옹을 꼽을 수 있다. 나폴레옹이 직접 선택한 궁정화가인 루이 다비드(Louis David)는 오늘날로 치자면 왕실 전속 사진사에 해당되는데, 왕족의 모습을 단순히 초상화로만 그리기보다는 그 역사적 의의를 교묘하게 담은 대작을 주로 그린 작가로 유명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역시 ‘나폴레옹 황제와 조세핀 황제비의 대관식(La Coronation d'Empereur Napoléon et d'Emperesse Joséphine / 드농 8관 75 전시실)’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9.8m×6.2m의 거대한 그림으로, 황제의 관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는 대신 교황을 빠리로 초청하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한 대관식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인간 생활의 희극적, 비극적 측면을 냉정하리만큼 사실적으로 그린 떼오도르 제리꼬(Théodore Géricault)는 프랑스 혁명을 전후한 격변의 시대를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메두사의 뗏목(Le Radeau de la Méduse / 드농 9관 77 전시실)’은 메두사라는 이름의 프리깃함이 난파되어 뗏목에 의지한 채 12일간을 버텼던 선원들의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어둡고 음산한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인물과 난파된 배는 놀랄 만큼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극적인 어느 한 순간을 사진처럼 포착해내어 그림으로 옮긴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를 여는 역할을 한다. 낭만주의 화가로는 역시 외젠 들라크르와(Eugène Delacroix)가 대표적이다. 자유주의적이고 낭만적인 성향을 지녔던 들라크르와는 1830년의 7월 혁명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진보적이고도 급진적인 사상의 흐름에 상당히 경도되었던 듯하다. 이러한 그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 드농 9관 77 전시실)’이다. 공화국을 세우려는 민중들이 죽은 동지들의 시체를 넘으면서 삼색기를 들고 그들을 이끄는 여신의 뒤를 따라 진격하는 모습을 담은 이 작품에는 사실주의와 서사적 특징이 함께 녹아 있다. 노랑색과 갈색을 주조로 한 전체적인 작품 분위기가 장중하고 어둡지만, 여신이 들고 있는 삼색기가 낙관적인 미래를 상징하는 듯 밝게 빛나고 있다. 같은 전시실에 있는 또 하나의 들라크르와 대표작인, 대학살을 주제로 한 ‘사르다나팔의 죽음(La Mort de Sardanapale)’ 또한 낭만주의적인 극적 효과가 돋보이지만, 전작과는 달리 오리엔트 지역에 대한 강한 이국적 취향이 녹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빠리를 두고 예술의 도시라고 하지만 사실 서양 미술의 근본은 이탈리아 회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탈리아 미술이 발전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와 노력이 있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루브르에 소장된 이탈리아 회화 중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 치마부에(Cimabue)의 ‘옥좌의 성 모자(La Vierge et l'Enfant en Majesté / 드농 8관 3 전시실)’가 있다. 예전에 성당의 제단을 장식하던 패널화로, 윗부분이 뾰족한 5각형으로 되어 있다. 13세기 후반 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에는 황금색 바탕과 정형화된 인물의 표정과 같은 비잔틴 성화(聖畵)의 특징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그러나 섬세한 옷자락의 주름과 홍조를 띤 인물, 비교적 부드러운 표정 등에는 비잔틴 회화가 주는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느낌보다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여유롭고 낙천적인 기질이 스며 있어 서서히 르네상스가 다가오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치마부에의 뒤를 이은 이탈리아의 중세 화가로는 조토(Giotto)가 있다. 이탈리아 중북부의 주요 성당에서는 조토가 그린 프레스코 벽화가 아직도 그 아름다움을 찬란히 내뿜고 있는데, 루브르에 소장된 그의 작품으로는 제단장식 패널화인 ‘성흔을 받는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Saint François d'Assise Recevant les Stigmates / 드농 8관 3 전시실)’가 있다. 그림 한가운데에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앉아 있고 오른쪽 위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한 새가 성흔을 보내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치마부에 그림의 정적이고 정형화된 분위기와는 확연히 달라진 스타일을 느낄 수 있다. 아랫부분에 그려진 세 개의 그림은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성인이 살았을 때 행한 기적을 묘사한 것이다.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던 피렌체는 수많은 예술가들, 특히 조각가, 화가, 건축가를 배출한 곳으로 유명한데, 이들의 손을 거쳐 탄생한 작품 중에는 피렌체의 영광을 드러낸 것이 적잖이 있어 지금도 피렌체를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게 만든다. 우첼로(Uccello)가 그린 ‘산 로마노 전투(La Bataille de San Romano / 드농 8관 3 전시실)’도 그중 한 작품으로, 1432년에 피렌체가 베네치아를 상대하여 벌인 산 로마노에서의 전투를 묘사한 것이다. 이 그림은 코지모 데 메디치의 명으로 그려진 세 작품 중 하나로, 루브르에 한 점이 있고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과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 각각 한 점씩 전시되어 있다. 전투에 나서는 말 탄 기사들의 당당한 모습과 하늘을 찌를 듯 위로 향한 기치창검이 완벽한 기하학적 구도 안에서 흐트러짐 없는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먼 쪽을 축소해서 그리는 원근법을 써서 많은 인물과 동물이 등장하는데도 주제가 함축적으로 모아지는 한편 화려하고 세밀한 장식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당시의 풍물을 엿볼 수 있다. 르네상스기에 이탈리아의 귀족들 중에서 가장 교양 있고 기품 있는 귀족으로 알려진 집안은 페라라의 에스테 집안이었다. 피사넬로(Pisanello)가 그린 ‘에스테 공주 초상(Portrait d'une Princesse d'Este / 드농 8관 4 전시실)’은 에스테 집안의 어느 공주의 옆모습을 그린 것으로 43×30cm의 자그마한 그림이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찾는 작품이다. 루브르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Léonardo da Vinci)의 ‘모나리자(Mona Lisa / 드농 9관 13 전시실)’를 꼽을 것이다. 77×53cm의 자그마한 그림이 유리관에 봉해진 채 전시되어 있다. 아름다운 시골 풍경을 뒤로 하고 발코니의 팔걸이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살짝 옆으로 몸을 틀고 있는 모나리자는 너무도 신비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어두운 색의 단순한 드레스가 더더욱 표정을 풍부하게 살려주는데, 머리 위에 보일 듯 말 듯 드리워진 투명한 검정색 베일은 놀랄 만큼 섬세하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모나리자의 표정이 행복해 보이는 것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얼굴을 반으로 나누어 왼쪽 부분(보는 방향에서)은 여유롭고 행복하지만 오른쪽 부분은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 입이 일그러져 보인다. 파도바 출신인 만테냐(Andréa Mantegna)는 우첼로의 독특한 원근법을 발전시킨 르네상스 화가로, 성당의 제단을 장식하던 그림을 많이 남겼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La Crucifixion / 드농 8관 5 전시실)’은 만테냐의 작품 중 최초로 걸작 칭호를 받게 된 작품으로, 완벽한 구도와 원근 처리가 문외한의 눈에도 확 뜨일 만큼 뛰어나다.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르네상스기의 3대 천재로 일컬어지는 라파엘로(Raffaello)는 앞의 두 천재와는 달리 오로지 회화에만 천착했던 화가였다. ‘성 모자와 세례자 성 요한(La Vierge à l'Enfant / 드농 8관 5 전시실)’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 때문에 ‘아름다운 정원사(La Belle Jardinière)’라고도 불린다. 극히 단순한 삼각형 구도이지만 성모마리아의 자애로운 표정과 천진난만하고도 포동포동한 두 어린아이들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 빙그레 미소를 짓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라파엘로가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그린 성모마리아 연작 중 하나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엿보인다.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다 빈치의 ‘수태고지’와 비교해 보자. 스푸마토 기법으로 표현된 부드러운 배경의 풍경과 피라미드형 구조는 다 빈치의 작품에서 온 것임이 분명하지만, 라파엘로의 작품은 다 빈치에 비해 훨씬 정돈되고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성 모자와 세례자 성 요한’과 비슷한 주제와 분위기를 간직한 다 빈치의 작품으로 ‘성 모자와 성녀 안나(La Vierge à l'Enfant et Ste. Anne / 드농 8관 5 전시실)’는 16세기 초반에 밀라노에서 그려진 것으로 인물의 표정과 동작이 극히 신중하고 차분한 것이 특징이다. 사실 이 작품은 완성된 것이 아니며, 마치 흐릿한 간접 조명을 통해 보는 작은 연극무대처럼 작으면서도 크고, 넓으면서도 황량하지 않은 화면 위로 탁월한 공간감각을 연출한다. 


르네상스 뒤를 이어 등장한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화가 카라밧조(Caravaggio)는 특이하고도 비극적인 인생 역정을 그림에 그대로 드러냈는데, 유명한 작품으로 ‘점쟁이(Buonaventura)’와 ‘동정녀의 죽음(La Mort de la Vierge / 드농 9관 7 전시실)’이 있다. 로마의 한 수도원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동정녀의 죽음’은 발표 당시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대부분의 예술작품에서 성모마리아는 성스럽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묘사되지만, 이 작품 속의 성모마리아는 물에 빠져 죽은, 몸이 퉁퉁 불은 여인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 앞의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우는 여인은 마리아 막달레나이며, 주변에 둘러선 예언자들과 선지자들도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흐느끼는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당대 성직자들은 이 처절하고도 비참한 모습 뒤에 숨은 진정한 성스러움을 파악할 수 없었던 듯 일제히 카라밧조에게 돌을 던졌다. 그림 속에는 침대 위에 누운 죽은 성모와 애도하는 사람들 외에는 별다른 특별한 장치가 없다. 다만 천장에 매달린 붉은 천의 주름이 극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사선으로 비추는 한 줄기 빛만이 등장인물들에게 깊이를 더해줄 뿐이다. 이러한 효과를 명암대조법, 즉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고 하는데, 카라밧조가 그 창시자였다. 벨기에가 배출한 가장 유명한 화가로는 루벤스(Peter Paul Rubens)가 있다. 리슐리외 관 2층의 초대형 18 전시실은 “메디치 갤러리(Galerie de Médicis)”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며, 루벤스가 그린 24점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권력욕이 상당했던 메디치 가의 마리아는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왕비가 되어 뤽상부르 공원에 고향 피렌체의 피티 궁과 닮은 궁전을 짓고 루벤스에게 궁전을 장식할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루벤스는 마리아의 일대기 중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만을 골라 모두 24점의 거대한 회화로 남겼다. 풍부한 색감과 당당하고도 화려한 인물 묘사, 고대 신화를 인용해 은유한 마리아 데 메디치의 영광을 담은 이 그림들을 관람할 때에는 먼저 그림 밑에 씌어 있는 숫자부터 확인하도록 하자. 1번부터 24번까지의 일련번호와 함께 그림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 씌어 있으므로 전체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다. 루벤스와 가장 비교가 되는 화가로는 네덜란드의 렘브란트(Rembrandt Harmenz. van Rijn)를 들 수 있다. 유복하고 여유로운 일생을 보낸 루벤스와는 달리 렘브란트는 가난과 고통의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한 불운했던 화가였다. ‘목욕하는 밧세바(Bethsabée au Bain / 리슐리외 3관 31 전시실)’는 은유와 상징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밧세바는 성서 속의 인물로, 남편을 잃고 나서 다윗 왕의 청혼을 받고 재혼한 후 그 후손을 낳은 여인이다. 그림 속의 밧세바는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욕조에 걸터앉아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 다윗 왕은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밧세바가 손에 쥔 편지 한 장으로 가장 극적인 역할을 한다. 즉 목욕하는 밧세바의 모습을 보고 반한 다윗 왕이 그녀에게 청혼을 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은은한 빛은 여인의 누드를 사실적이면서도 따뜻하게 묘사하는데, 이는 베네치아 화풍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15~16세기의 플랑드르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화가로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를 들 수 있다. 프랑스, 특히 부르고뉴 지방에서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한 반 아이크는 섬세하고도 객관적인 묘사가 특기였는데, ‘법관 롤랭의 동정녀 마리아(La Vierge du Chancelier Rolin / 리슐리외 3관 4 전시실)’가 대표작이다. 부르고뉴 대법관이었던 롤랭이 의뢰하여 제작한 이 작품은 붉은 망토를 걸치고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마리아 앞에 롤랭이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하고 아기예수가 강복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화려하고 정교한 장식을 한 실내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사뭇 대조적인데, 강과 다리가 보이는 풍경은 부르고뉴의 실제 풍경이 아니라 작가가 창조해 낸 것이다. 장식미술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리슐리외 관 1층에 마련된 전시실을 놓치지 말자. 나폴레옹 3세의 저택을 그대로 복원한 전시실을 비롯하여 중세, 르네상스, 17~19세기를 대표하는 장식미술품이 어마어마한 규모로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나폴레옹 3세의 저택은 화려함과 장중함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부대시설 & 주변 카페
미술관 곳곳에 구내서점과 기념품점이 자리 잡고 있다. 소장한 작품에 대한 도판과 해설을 겸한 서적은 주제와 내용에 따라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화집과 포스터 등도 다량 구비되어 있다. ‘루브르 라 비지트(Louvre La Visite)’는 고대 미술, 중세 미술 및 각 나라별 회화와 장식미술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포괄적인 소개가 되어 있고 미술관의 유래와 건축학적인 특징까지 설명이 되어 있어 루브르 관람에 큰 도움이 된다. 이 밖에도 수없이 많은 루브르 관련 도서가 있으므로 관람을 시작하기 전에 서점을 미리 훑어보는 것도 좋다. 그 외에도 머그컵, 문구류, 스카프, 액세서리 등 수많은 종류의 기념품이 구비되어 있어 관람 후 한자리에서 쇼핑을 할 수 있어 편리하다. 지하에는 소규모 관광안내소가 있어 루브르 미술관은 물론 빠리 시내와 근교의 여행정보를 얻을 수 있다. 또한 버진 메가스토어 같은 음반, 서적 코너와 지하상가가 연결되어 있어 편리하다. 각 전시관마다 전시관의 이름을 딴 까페가 층마다 자리 잡고 있으며, 우아한 분위기에서 커피와 식사를 함께 즐길 수 있다. 루브르 미술관에서 리볼리 거리로 나가는 주랑(柱廊) 바로 아래에 자리 잡은 화려하고 우아한 까페 마를리(Café Marly / 주소 : 93, rue de Rivoli)는 방대한 루브르 미술관 관람을 마친 후 아픈 다리도 쉬고 홀쭉해진 배도 채울 겸해서 들르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다. 식사를 하려면 보통 ?40 정도는 예상해야 하지만 결코 그 가격이 아깝지 않을 만큼 맛있는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맛볼 수 있다. 사마리뗀 백화점의 옥상에 위치하고 있는 뚜빠리, 라 사마리뗀(Le Toupary, La Samaritaine / 주소 : 2, quai du Louvre, 전화 : 01 40 41 29 29)은 빠리 시내의 레스토랑과 까페 중에서 가장 전망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오르면 주변의 유명 관광 포인트는 물론 세느 강 건너편의 스카이라인도 눈에 잡힌다. 76번 버스 종점이 바로 앞에 있다.(la samaritaine이 2011년까지 공사예정이어서 영업이 중단되었음) 


주변 볼거리
루브르 미술관의 리슐리외 관 끝자락에 장식미술관과 복식박물관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장식미술관(Musée des Arts Décoratifs / 주소 : 107, rue de Rivoli)은 응용미술에 관한 모든 것을 소장하고 있다. 19세기 이전에 프랑스 왕실과 귀족들이 사용하던 가구, 식기, 은제품 등의 생활용품은 물론 집안을 장식하던 조각, 회화, 각종 장식품 등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층별로 시대에 따른 작품을 전시하는데, 특히 1층은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현대 응용미술 작품을 전시해 놓아 익숙한 느낌이다. 2층은 중세부터 르네상스까지의 가구, 3~4층은 태양왕 시대부터 제2제정 시대까지의 장식미술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5층에서는 각종 소품을 관람할 수 있다. 복식박물관(Musée de la Mode et du Textile)은 프랑스 패션의 역사를 일람할 수 있는 곳으로, 의상 전공자나 패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곳이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17세기의 복식작품에서부터 현대의 오뜨 꾸뛰르 작품에 이르기까지의 방대한 전시작품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그 어느 시대보다 급변했던 20세기 패션에 관한 작품 전시가 뛰어나며, 복식 관련 비디오테이프도 마련해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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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르나발레 박물관

메트로:1호선 생‐뽈(Saint‐Paul)역, 8호선 슈맹 베르(Chemin Vert)역 하차 | 버스:29, 69, 76, 96번
10:00~18:00(화~일)
월, 공휴일
입장료:무료. 특별 전시가 있을 경우에만 별도의 입장료 책정 적용
사진촬영:플래시 없이 가능

 

박물관 설립 배경
1880년에 개관한 이래 탄생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빠리의 역사를 증언하는 수많은 작품들이 나란히 붙어 있는 두 채의 건물에 시대별로 배치되어 있다. 주 전시관으로 사용되는 꺄르나발레 저택(L'Hôtel Carnavalet)은 16세기 중반에 고등법원장이었던 자끄 드 리뉴리가 세운 것으로, 빠리 시내에 남아 있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축제라는 뜻을 가진 꺄르나발레는 1578년에 이 저택을 매입한 프랑수아즈 부인의 브르따뉴 출신 남편 케르네브느와의 별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1654년에 이 저택은 유명한 건축가인 프랑수아 망사르가 확장공사를 실시하여 1660년 무렵에는 보다 현대적인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678년부터 이 저택은 세비녜 후작 부인(Marquise de Sévigné)에게 임대되었고, 1696년에 세비녜 후작 부인이 이곳에서 세상을 떠난 후 저택 앞의 작은 거리 이름도 후작 부인의 이름을 따 새로이 명명되었다. 그 후 1866년에 빠리 시 당국이 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매입하였다. 건축가 빅또르 빠르망띠에(Victor Parmentier)가 내부 변경공사와 복원공사를 담당하여 약 15년간 전시공간을 확대하였다. 마침내 1880년에 꺄르나발레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모습을 드러낸 이래 20세기 들어 두 차례의 전시공간 및 전시작품 확대공사를 거쳐 오늘날과 같은 박물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꺄르나발레 저택과 이어져 있는 르 뺄띠에 드 생 파르고 저택(Hôtel Le Peletier de St. Fargeau)은 국회의원이자 재무행정 관료였던 미셸 르 뺄띠에(Michel Le Peletier)가 1690년경에 지은 것이다. 설계를 맡은 이는 빠리의 관문인 생 마르땡 문(Porte St. Martin)을 설계한 삐에르 뷜레(Pierre Bullet)였다. 



특징
루브르가 인류의 대표적 문명, 문화를 전시하는 박물관이라면, 꺄르나발레 박물관은 빠리의 문명과 문화를 전방위적으로 전시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갈로 로마 시대의 유적과 중세 유적은 물론 프랑스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었던 대혁명 시대의 유물들이 다른 어느 박물관보다 많이 전시되어 있으며, 회화, 조각, 가구, 역사적 기념물들이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어 다양한 분야의 역사고증에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옛 왕족과 귀족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와 조각이 많이 있어 프랑스에서는 역사극을 만들 때 고증을 거치기가 그리 힘들지 않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 파급 효과가 엄청났던 프랑스 대혁명의 모든 전개과정과 문학가, 철학자들에 관한 자료를 통해 프랑스 지성의 역사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전시실
박물관 출입구로 들어가면 곧바로 꺄르나발레 전시관으로 이어진다. 16세기에 지어진 꺄르나발레 저택과 17세기에 지어진 뺄띠에 전시관은 1층의 갤러리로 연결되어 있다. 꺄르나발레 전시관에는 두 개 층에 걸쳐 모두 65개의 전시실이 배치되어 있으며, 뺄띠에 전시관에는 세 개 층에 모두 47개의 전시실이 자리잡고 있다. 작품은 전시실 번호에 따라 연대별로 전시되어 있어 순서대로 관람하면 빠리의 역사, 문화, 예술의 변천과정을 모두 돌아볼 수 있다. 꺄르나발레 전시관의 그라운드 층 1~4 전시실에는 빠리의 기원부터 중세 말기까지의 유물이, 7~10 전시실에는 16세기의 빠리에 관한 작품이 있다. 전시실이 가장 많은 1층에는 17세기부터 18세기 후반 루이 16세 시대까지 왕조별, 시대적 사건별로 전시실이 구분되어 있다. 특히 이 저택에서 20여 년간 살았던 산문작가 세비녜 부인(Madame Sévigné)과 그녀의 딸인 그리냥 부인(Madame Grignan)의 초상화를 비롯, 17세기의 빠리 지식인들의 초상화가 전시된 21 전시실과 17세기의 화려한 실내장식이 돋보이는 꼴베르 재상의 전시실(17 전시실) 및 루이 14세의 유물이 있는 20 전시실, ‘회색 방’이라고도 불리는 루이 15세의 전시실(43 전시실)과 ‘푸른 방’이란 이름이 붙은 루이 16세 전시실(53 전시실) 등이 특히 주목해야 할 곳이다. 꺄르나발레 전시관 1층의 45 전시실 앞으로 나 있는 기다란 통로를 따라가면 뺄띠에 전시관에 닿는다. 뺄띠에 전시관의 1층에는 마르셀 프루스트를 비롯한 유명 인사들의 방을 재현해 놓은 곳이 많으며, 2층 전시실은 모두 프랑스 대혁명에 할애되어 있다. 2층 관람을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19세기의 낭만시대와 20세기에 접어든 빠리의 모습을 전시하는 그라운드 층으로 내려오게 된다. 빠리의 거리에 이름을 빌려준 당대의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와 나폴레옹 시대의 유물, 1830년 7월 혁명 때의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배낭 등의 짐을 ‘짐 보관소(Vestiaire)’에 맡긴 뒤 마당을 가로질러서 안쪽 끝에 있는 1 전시실부터 차례대로 관람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시간이 없으면 원하는 전시실로 곧바로 가도 상관없다.


주요 전시작품
장 구종(Jean Goujon)과 망사르(Mansart)의 부조로 장식된 입구를 지나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면 갑자기 타임머신을 타고 16세기에 온 듯 한 느낌이 들 만큼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아름다운 네 개의 정원을 가운데 두고 밭전(田)자 모양으로 설계된 꺄르나발레 전시관은 그라운드 층부터 관람이 시작된다.

1 전시실

선사시대 및 초기 역사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돌로 만든 도구와 짐승의 뼈로 만든 장식품 등 구석기시대 유물을 비롯하여 원시 토기와 돌도끼 같은 신석기시대 유물이 있다. 또한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무기도 장식품 및 선사시대 갈리아의 한 부족인 빠리지(Parisii)족 부장품, 일상 생활용품, 금화 등이 두루 전시되어 있다. 빠리라는 지명은 바로 이 시대의 부족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전시실은 규모는 작지만 연대기적으로 가장 오랜 기간의 유물을 전시하는 곳이다. 청동기, 철기시대의 유물은 전세계 어느 지역이든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어 흥미롭다.

2 전시실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4세기 말까지의 갈로 로마 시대의 뤼떼시아 유적이 전시되어 있다. 뤼떼시아는 로마 식민지 시대의 빠리 이름으로, 빠리 5구에는 ‘뤼떼스 경기장(Arènes de Lutèce)’이라는 이름의 로마 시대 유적이 있다. 이 시대의 뤼떼시아는 도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세느 강과 마른느 강을 낀 교통의 요충지로서 상당한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에는 갈로 로마 시대에 유행했던 비석과 부장품, 죽은 아이의 데드마스크가 전시되어 있는데, 데드마스크는 우연히 만들어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인물 조각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고, 유약을 발라 구운 토기와 청동 및 유리 공예품, 보석, 주 화 등이 제작되었다. 이 무렵 끌뤼니에 로마식 공동 욕장이 들어섰고, 서서히 기독교 문명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3 전시실
중세 초기인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유적이 전시되어 있다. 6세기에 빠리는 클로비스 왕의 통치 아래 프랑스의 수도가 되었다. 이 무렵에는 부조 장식을 한 석관과 석고관으로 무덤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잦아진 전쟁 때문에 무기 제조 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하였으며, 상감 장식을 입힌 장식품이 등장하였다. 또한 프랑스 왕의 업적을 나타내는 금화를 주조하였으며, 보다 세련된 도자기와 귀금속 공예품을 볼 수 있다.

4 전시실
위그 까페를 시조로 한 까페 왕조 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빠리는 다시 수도로서의 위상을 회복하였으며, 필립 오귀스뜨 왕과 루이 9세, 샤를 5세 치세(治世)에 최전성기를 구가하였다. 13세기에 노트르담 대성당 정문을 장식하던 기둥과 생 루이로 불렸던 루이 9세의 모습을 조각한 묘석, 생 루이의 아들 무덤을 장식한 부조 및 사냥 장면이 묘사된 기둥 머리 장식 등 12~15세기에 걸쳐 제작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생 루이는 프랑스 십자군 원정을 이끈 왕으로, 성왕(聖王)으로도 불릴 만큼 후덕한 인물이었다. 이 전시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15세기경에 제작된 스테인드글라스 조각으로, 청아하고 투명한 유리의 아름다움이 수세기의 세월을 넘어 그대로 전해진다. 1 전시실로 되돌아가 두 개의 정원 사이에 있는 복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작은 계단 옆에 30, 31 전시실이 있고 그 옆에 7~11 전시실이 배치되어 있다. 이곳은 16세기부터 앙리 4세 시대까지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7 전시실
꺄르나발레 저택을 지은 사람의 이름을 따 리뉴리 전시실(Salle Ligneris)이라고도 불리는 7 전시실은 중세 빠리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그림과 시가도가 전시되어 있다. ‘어린 양들을 지키는 쥬느비에브 성녀(Ste. Geneviève Gardant ses Moutons)’는 빠리의 수호 성인인 쥬느비에브의 모습 뒤로 빠리 시가지가 그려진 대형 작품으로, 16세기에 그려진 것이나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플랑드르 화파가 그린 ‘생 이노상 성당과 묘지 풍경(Vue du Cimetière et l'Église des St. Innocents)’은 16세기 중반 빠리 시가지의 모습을 두루 담고 있으며, 고 건축물을 자세하게 묘사하여 지금은 없어진 옛 건물들의 모습을 유추하거나 복원작업을 할 때 도움이 된다.

8 전시실
프랑스 왕조사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여인 ‘꺄트린 드 메디치의 초상화(Portrait de Catherine de Médicis)’가 있어 꺄트린 드 메디시스 전시실(Galerie de Catherine de Médicis)이라고도 불린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인 카타리나는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결혼하였으며, 남편이 죽은 후 철권을 휘두른 강력한 섭정으로 유명한 여인이다. 아들과 딸을 철저하게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만들면서까지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철의 여인 카타리나 데 메디치의 딸은 바로 그 유명한 여왕 마고(La Reine Margot)이다. 이 전시실에는 카타리나의 초상화 외에 아들인 샤를 9세의 초상화가 함께 걸려 있으며, 모두 끌루에(François Clouet)의 작품이다. 당시의 빠리 시가지와 사람들의 모습을 잘 나타낸 ‘시떼 섬에서의 가톨릭 교도들의 행진(La Procession de la Ligue dans l'Ile de la Cité)’은 신구교도간의 종교분쟁이 극심했던 시대상을 잘 표현한 작품이나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또 하나 흥미로운 그림은 ‘뽕 뇌프 계획도(Projet pour le Pont Neuf)’이다. 회화라기보다는 건축 시공에 앞서 제작하는 조감도 역할을 하던 것인데, 앙리 3세는 이 그림을 보고 다리 건축을 승인하여 마침내 1578년에 당시로서는 최첨단 공법을 사용한 뽕 뇌프를 놓게 되었다. 1606년에 완공된 뽕 뇌프는 “새로운 다리”라는 뜻이지만 현재는 세느 강에 놓인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9 전시실
‘앙리 4세 전시실(Galerie Henri IV)’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종교분쟁이 극심하던 시대에 프랑스 왕위에 오른 앙리 4세는 낭뜨를 중심으로 한 위그노 교도들의 안전을 위해 스스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다음 “낭뜨 칙령”을 반포하여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업적을 남겼다. ‘그레브 광장에서의 가톨릭 교도들의 행진(La Procession de la Ligue sur la Place de Grève)’은 8 전시실의 작품과 비슷한 분위기로, 당시 주도권을 잡고 있던 가톨릭 교도들의 시위 모습을 담고 있다. 그레브 광장은 지금의 빠리 시청 앞 광장으로, 오래 전부터 대중시위가 자주 벌어졌던 곳이다. 그림 중간 뒤쪽으로 시떼 섬이 보이고 그 너머로 노트르담 대성당의 종루가 아스라이 보이는 등 16세기의 빠리 풍경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10 전시실
‘푸른 전시실(Galerie Bleu)’로 불리는 10 전시실은 앙리 4세 때 제작된 다양한 조각 작품과 회화를 전시하고 있다. 16세기의 빠리 시가지의 모습과 건축물, 다리 등이 그림에 표현되어 있다. 그 다음 전시실인 11~20 전시실은 1층에 있다. 이 전시실은 프랑스 역사상 최전성기였던 루이 13세 및 14세 시대의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11 전시실
그라운드 층과 1층 사이의 계단에 자리잡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계단 자체가 17세기에 지어진 것이라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이 계단에는 세비녜 계단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며, 계단 아래쪽에 루이 14세의 손녀딸인 부르고뉴 공작 부인을 사냥의 여신 디안느로 묘사한 테라코타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원래 앙뜨완느 끄와스보(Antoine Coysevox)의 대리석 작품을 모각한 것이다.

13 전시실
‘르와이얄 광장(La Place Royale)’이라는 그림이 눈길을 끄는데, 정사각형의 광장이 낯이 익을 것이다. 현재 이 광장은 보주 광장(Place des Vosges)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전시실에는 또 당시 유럽 미술계의 주류를 이루던 플랑드르 화파와 네덜란드 화파의 작가들이 그린 세느 강 풍경화, 빠리 시가지 풍경화가 전시되어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우리 눈에도 익숙한 ‘루브르 미술관(Grand Galerie du Louvre)’으로, 1640년에 네덜란드 화가인 베르베어(Abraham de Verwer)가 그린 것이다.

15 전시실
루이 14세 시대의 빠리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림에는 대부분 세느 강과 뽕 뇌프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부근 지역의 도시개발 현황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작품들이다. 이 시기에 루브르 궁전이 대대적으로 확장되었으며,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전신인 ‘프랑스 연구원(Institut de France)’이 설립되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는 밀레(Francisque II Millet)가 있다. 루이 14세의 업적을 찬양하는 그림에는 1667년에 세워진 천문대(Observatoire)가 보이는 풍경화와 루이 14세가 상이군인들을 위해 지은 앵발리드(Invalides)를 담은 작품이 있다. 앵발리드 내 돔 성당의 장식을 담당했던 마르땡(Pierre Denis Martin)의 그림 ‘베르시 둑에서 바라본 빠리 풍경(Paris Vue du Quai de Bercy)’에서는 노트르담 대성당과 생 루이 섬, 식물원 등 4구와 5구의 주요 지역을 모두 알아볼 수 있다.

17 전시실
작은 모퉁이에 딸린 17 전시실은 ‘꼴베르 드 빌라세르프의 화실(Cabinet Colbert de Villacerf)’이라는 별칭이 붙은 곳으로, 그로테스크한 벽화와 천장화가 전시실 전체에 그려져 있다. 마레 지역에 있는 꼴베르 재상의 방을 그대로 복원한 이 전시실은 루이 14세 시대의 실내장식 미술이 얼마나 화려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벽화와 천장화에는 주로 고대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들과 정교한 아라베스크식 문양이 그려져 있다. 천장화의 주제는 ‘아폴론과 4계절(Apollon et les Saisons)’이며 벽난로 위에는 꼴베르 재상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20 전시실
리비에르 수도원장의 침실을 복원한 곳으로 역시 르 브룅이 장식을 담당하였다. 8명의 여신들이 묘사된 ‘프쉬케의 이야기(L'Histoire de Psyché)’라는 그림이 걸려 있으며, 루이 13세와 14세의 초상화도 걸려 있다. 이곳에서 가장 재미있는 전시품은 청동으로 만든 거대한 발 조각이다. 원래 이 작품은 지라르동(François Girardon)이 제작한 루이 14세 전신상이었으나 대혁명 때 파괴되어 한쪽 발만 남은 것을 전시한 것이다.

21 전시실
다음 전시실인 21 전시실은 바로 옆에 있지 않고 11 전시실 앞에 있으므로 오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21~23 전시실은 꺄르나발레 저택에서 살았던 세비녜 후작 부인을 기념하는 곳이다. 21 전시실에는 ‘세비녜 전시실(Galerie Sévigné)’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데, 단아하고 검박(儉朴)한 분위기로 17세기의 실내장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는 세비녜 부인의 초상화가 두 점 있는데, 하나는 유화로 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파스텔로 그린 것이다. 르페브르(Claude Lefèvre)가 그린 유화 초상화는 세비녜 부인이 글을 쓰던 유명한 책상 위에 걸려 있는데, 바로크 양식의 영향이 느껴지는 단정한 그림이다. 특히 이마에 늘어뜨려진 곱슬머리까지 정밀하게 포착해 낸 섬세한 묘사가 아름다우며 부드러운 미소를 띤 부인의 표정이 잘 살아나 있다. 세비녜 부인의 딸인 그리냥 부인(Madame de Grignan)의 초상화는 17세기의 대표적 초상화가인 삐에르 미냐르(Pierre Mignard)가 그린 것이다. 미냐르 일가는 모두 초상화에 능했는데, 인물의 표정과 배경을 섬세하게 잡아내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의 고전문학을 대표하는 꼬르네이유(Corneille)와 몰리에르(Molière) 같은, 세비녜 부인의 살롱에 드나들던 문인들의 초상화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22~23 전시실
18세기 초반의 프랑스의 정치적, 외교적 상황을 나타내는 회화작품과 17~18세기에 제작된 도자기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다음 전시실을 관람하려면 다시 11 전시실 쪽으로 가야 한다. 동쪽으로 갈라지는 복도에 세 개의 전시실이 배치되어 있는데 구체제, 즉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시대의 빠리 시정(市政)과 관련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앙리 4세 이후 시청에는 역대 빠리 시장들의 초상화가 걸리게 됐는데, 이는 시정의 역사를 기록하고 다음 시장들에게는 지침 역할을 하던 것이었다. 이 박물관에 전시된 초상화는 혁명 때 시청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27 전시실
26 전시실에서 왼쪽 복도로 접어들면 27 전시실이 나온다. 이곳에는 루이 15세 시대인 1720~1760년의 빠리 모습을 보여주는 9점의 대형 풍경화가 전시되어 있다. 이 시대에는 급격한 도시발달이 주춤하는 대신 부촌과 빈민가가 명확히 구분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레벤브뢱(Charles‐Léopold de Grevenbroek)은 당시 가장 뛰어난 풍경화가였는데, 너무나 정확하게 표현한 정밀한 빠리 시가지 풍경은 손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세밀하다.

29 전시실
라그네(Nicolas Jean‐Baptiste Raguenet)의 풍경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미술작품으로서보다는 18세기 중반의 빠리 시가지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일종의 기록사진 역할을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 시떼 섬 풍경과 뽕 뇌프, 생 루이 섬, 시청, 루브르 궁전, 뛸르리 정원 등 오늘날까지 빠리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지는 곳들을 자세하게 묘사한 그림을 통해 옛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다. 다시 27 전시실로 와서 계단을 내려가면 그라운드 층에 30~31 두 개의 전시실이 나온다. 루이 15세 후기 시대의 장식미술품이 전시된 이곳에는 특히 복식사 연구에 도움이 될 만한 초상화가 많이 전시되어 있다. 이 시대에 유행하던 양식은 신고전주의로, 화려하면서도 점잖은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30 전시실
생‐또노레 거리에 있던 ‘밀리떼르 까페(Café Militaire)’를 복원해 놓은 곳이다. 국왕 휘하의 병사들이 주로 이용하여 ‘군인 까페’라는 이름을 얻은 이 까페는 당시 사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으로, 1762년 스타일의 장식은 남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31~32 전시실
르두(Calude‐Nicolas Ledoux)라는 사람이 지은 위제 저택(Hôtel d'Uzès)의 접견실을 복원한 것이다. 몽마르트르 부근에 있던 원래 저택은 19세기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푸른빛을 띤 흰색의 벽과 천장에 황금빛 장식이 되어 있는 이 화려한 방은 당시 귀족의 호사스러운 생활양식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31 전시실과 이어진 계단은 32 전시실로 사용되며, 다시 1층으로 오르는 통로 역할을 한다. 17세기에 빠리 대저택을 꾸미던 고풍스런 가구와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탈리아인 화가가 담당한 아름다운 실내장식이 눈에 뜨인다.

36~37전시실
푸른 바탕에 번쩍이는 금장식 천장이 있는 36 전시실을 지나면 ‘루이 15세의 라일락 살롱(Salon Lilas, Louis XV)’이라는 별칭이 붙은 37 전시실이 나온다. 전체적으로 푸른 색조를 띤 실내장식이 우아하고 거만한 느낌을 주며, 고풍스러운 가구와 패널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당시 최고 솜씨의 장인이 만든 기다란 의자는 귀족이나 왕족의 저택에서 흔히 사용되던 것으로, 귀부인들이 비스듬히 앉아 손님을 맞거나 휴식을 취하던 것이라고 한다.

39~40 전시실
부쉐(François Boucher)의 파스텔화를 비롯, 회화, 도자기, 귀족들이 쓰던 부채, 밀랍인형 등이 함께 전시되어 있으며, 40 전시실에는 루이 14세와 15세 사이의 섭정시대에 제작된 장식미술품이 있다.



43 전시실
다시 40 전시실을 지나면 그 옆에 ‘루이 15세의 푸른 응접실(Salon Bleu, Louis XV)’이라는 별칭의 43 전시실이 나온다. 1740년경 로코코 양식으로 제작된 천장과 벽면 패널 장식은 세느 강변의 고급 저택에서 가져온 것이다. 금박을 넣어 장식한 고급스러운 가구와 정교한 문양의 아름다운 카펫이 놓여 있으며, 벽면은 푸른 바탕에 흰 무늬가 들어가 있다. 



45~47 전시실
세 전시실 모두 루이 15세 시대의 다양한 가구와 조각, 회화를 전시하고 있어 이 시기에 프랑스의 장식미술이 얼마나 발달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48 전시실
지금까지의 전시실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철학자들의 방(Salle des Philosophes)’이라는 별칭답게 이곳에서는 18세기의 철학자들과 문인들, 백과전서파 학자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볼테르(Voltaire)와 루소(Rousseau)의 테라코타 흉상을 비롯하여 ‘볼테르의 어린 시절 초상(Voltaire dans sa Jeunesse)’과 같은 초상화가 여러 점 전시되어 있다. 계단참을 가로질러 가면 루이 16세 시대의 유물을 전시한 공간이 시작된다. 이 시대는 구체제 말기에 해당되는 시기로, 30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프랑스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을 눈앞에 둔 시대였다.

52~53 전시실
‘루이 16세의 노란 응접실(Salon Jaune, Louis XVI)’이라고 불리는 52 전시실에는 화려하고도 고급스러운 가구가 전시되어 왕조의 마지막 영화를 나타내고 있다. 53 전시실은 ‘루이 16세의 푸른 응접실(Salon Bleu, Louis XVI)’으로 미셸 갸르니에(Michel Garnier)가 그린 대형 풍속화가 전시되어 있다. 미술사적 가치는 없지만 당시 귀부인들의 옷차림을 상세하게 묘사하여 복식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57~58 전시실
수플로(Soufflot)의 빵떼옹 설계도를 비롯해 루이 15세 시대 후기 빠리 도시 계획의 주요 성과물을 나타낸 그림과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주요 건축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회화와 왕의 조각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안쪽에 딸린 58 전시실은 부쉐가 장식을 담당한 방으로, 판화가인 친구의 가게를 복원한 것이다.

61~63 전시실
18세기의 회화와 루이 16세의 가구가 전시된 복도를 지나 61 전시실로 가면 빠리 근교의 샤또 꽁플랑(Château de Conflans)에서 가져온 목제 가구와 장식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성은 빠리 대주교들의 저택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장식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낯익은 작품으로는 꽁꼬르드 다리(당시에는 ‘루이 16세 다리’라고 불렸다) 모형과 빨레 르와이얄의 화재사건을 그린 그림이 있다. 좌우에 배치된 62~63 전시실에도 샤또 꽁플랑 성에서 가져온 작품들이 연이어 전시되어 있다. 꺄르나발레 전시관의 관람을 마쳤으면 45 전시실 앞의 연결통로를 이용하여 뺄띠에 전시관으로 가서 2층으로 올라가거나, 그라운드 층으로 내려가 정원을 통해 뺄띠에 전시관으로 가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뺄띠에 전시관 2층 전시실은 이 박물관에서 가장 극적인 시대를 상징하는 유물을 전시하는 곳이다.

101 전시실
2층 첫 전시실인 101 전시실에는 1789년 민중들의 희망이 담긴 내용을 그린 대형 그림과 함께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유명한 문구가 씌어진 프랑스 국기가 전시되어 대혁명 전야의 긴장된 순간을 전하고 있다. 또한 앙시앵 레짐 말기의 위기에 처한 국가 상황을 기술한 문서와 전단 등이 있으며, 국민공의회의 활동과 국회 창설에 관련된 자료와 함께 당시 주요 인물들의 초상화와 흉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102 전시실
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한 바스띠유(Bastille) 감옥에 관련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혁명 당시의 상황을 그린 그림과 바스띠유 감옥 모형이 1789년 7월 14일의 극적인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한편, 혁명의 한가운데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혁명 당시의 시가지 모습을 그린 그림에는 바스띠유가 파괴되는 장면, 시민들이 모여 시위를 하는 모습 등이 묘사되어 있다.

103 전시실
혁명 1주년 기념일인 1790년 7월 14일에 결정된 동맹의 날과 관련된 전시실이다. “인권선언”과 관련된 내용을 묘사한 우화와 함께 루이 16세와 로베스삐에르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전해에 비해 비교적 평화로웠던 이 시기에는 스스로 얻어낸 자유와 평등에 감격한 일반인들이 남긴 그림과 조각이 상당수 남아 있다.

104 전시실
공화국으로 국가체제를 바꾼 1792년 무렵의 시대 상황을 나타내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1790년부터 2년간 프랑스는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792년 8월에 대학살이 벌어지면서 군주제를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인권선언문”이 인쇄된 벽지를 바른 가구와 우화적 내용을 담은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국민공의회에서 활동한 지롱드 당원들의 초상화와 흉상이 있다.

105 전시실
마리 앙뜨와네뜨와 루이 16세를 비롯한 왕실 가족에 관한 전시실이다. 아마도 이 박물관에서 가장 비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곳은 바로 이 전시실일 것이다. 아름다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국민들의 미움을 샀던 비운의 왕비 마리 앙뜨와네뜨의 초상과 왕비에게 이별을 고하는 루이 16세의 초상을 비롯하여 자녀들인 앙굴렘 공작 부인과 루이 17세, 왕의 누이인 마담 엘리자베뜨 등 왕실 가족의 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107~108 전시실
공포정치 시대와 관련된 곳이다. 1792년부터 2년간은 혁명기간 중 가장 극적이고도 무시무시한 시기였다. 국민공의회에서 맞붙은 대결에서 온건파인 지롱드 당이 강경파인 쟈코뱅 당에게 패배하면서 유혈사태가 끊임없이 벌어지게 되었다. 로베르(Hubert Robert)가 그린 세 점의 회화에는 공포정치 시대 빠리의 우유 배급과 구기 경기 등 태풍의 눈과 같은 불길한 평화 속의 일상이 그려져 있다.

109 전시실
혁명의 정점에 이른 떼르미도르(Thermidor)와 집정내각(Le Directoire) 시대와 관련된 곳이다. 떼르미도르 시대는 1791~1794년까지 약 4년간이며, 이 시대에 공포정치는 막을 내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단두대로 보냈던 로베스삐에르 자신도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더불어 차츰차츰 평화의 시대가 다시 찾아오고 있었다. 이 전시실에도 로베르의 풍속화가 전시되어 당시 빠리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떼르미도르에 이은 집정내각 시대는 1795~ 1799년이며, 이 무렵 프랑스는 완전히 파산상태에 빠져 혁명 세력간의 알력으로 인한 부정부패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벼락부자들이 등장하여 개인적으로 군사력을 키우는 등 시국은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이 전시실에는 당시 내각을 주도한 두 명의 집정관의 초상화가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문서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와 같은 혼란의 시대 끝에 마침내 1799년, 코르시카 출신의 키 작은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대혁명의 시대도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되었다.

111 전시실
혁명의 어두운 면을 상징하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혁명 당시 수많은 종교기관이 약탈을 당하고 소중한 건축물들이 파괴되었는데 일부는 분노한 폭도들의 손에 의해 의도적으로 이루어졌고, 일부는 무관심에 의해 철저하게 방치된 결과였다. 로베르가 그린 ‘그레브 광장의 생 장 성당의 파괴(Démolition de l'Église Saint Jean en Grève)’는 시청 뒤에 있던 옛 성당이 약탈되는 것을 묘사한 작품이다. 전시실 한쪽에 나란히 전시된 두 점의 초상화는 알렉상드르 르느와르Alexandre Lenoir 부부의 초상화이다. 르느와르는 혁명의 와중에서도 소중한 예술품을 보호하고 수집하여 옛 수녀원 자리에 박물관을 세운 사람이었다. 이 박물관은 나중에 국립미술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무렵 빵떼옹은 종교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접고 프랑스의 위인들이 안치된 국립묘지로 변형되었다.

115 전시실
2층 전시실 관람을 마쳤으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라운드 층으로 내려가 115 전시실로 가자. 이 전시실에는 19세기 초반 나폴레옹이 황제로 등극한 제1제정 시대에 제작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1799년에 쿠데타를 일으킨 나폴레옹은 5년 후인 1804년에 로마의 교황을 빠리로 불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 이전까지 유럽의 황제는 모두 직접 로마 교황청으로 가서 교황에게서 황제의 관을 하사받았으나, 나폴레옹은 자신이 직접 황제의 관을 쓰는 등 철저하게 종교와 정치를 분리시킨 행동으로 당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프랑스에는 훌륭한 미술가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었다. 르페브르(Robert Lefèvre)의 나폴레옹 1세 전신 초상화를 비롯하여 프뤼동(Pierre‐Paul Prud'hon)이 그린 ‘뻬리고르 장군 초상(Portrait de Périgord)’, 제라르(François Gérard)의 ‘레까미에 부인 초상화(Portrait de Madame Recamier)’ 등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회화작품이다. 레까미에 부인의 초상화는 여러 화가들이 그렸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루브르 미술관에 있는 다비드의 작품이다. 한편 황제 대관식 참석을 위해 빠리를 방문했던 당시의 교황 피우스 7세의 흉상도 있어 도도하고 자신만만했던 나폴레옹의 초상화와 비교가 된다.

116 전시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속담이 가장 잘 어울리는 116 전시실은 해외 원정에서 실패하여 실각한 나폴레옹을 대신해 세워진 왕정복고 시대를 상징하는 곳이다. 비록 입헌군주제하의 국왕이었지만 루이 18세와 샤를 10세는 프랑스 왕조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왕으로서 어느 정도 국민들의 인정을 받았다. 르페브르와 제라르가 그린 두 왕의 초상화와 함께 왕정복고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회화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비명에 간 루이 16세를 추모하는 행사를 담은 그림과 왕의 생일을 맞아 시민들에게 포도주와 버섯을 나눠주는 행사 장면을 묘사한 어용 회화가 전시되어 있다.

119 전시실
왕정복고 시대도 오래가지 못했다. 1830년 7월에 다시 혁명이 발발하여 샤를 10세가 실각하고 루이‐필립(Louis‐Philippe)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 시기와 관련된 119 전시실에는 르꽁뜨(Hippolyte Lecomte)를 비롯한 화가들이 저항운동을 주제로 한 그림과 바스띠유 광장에 세워진 혁명 기념탑인 7월 주(柱/Colonne de Juillet)의 청동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실에서 가장 멋있는 작품은 루이 풀리(Louis Foulley)가 제작한 ‘시청 앞 광장 모형’이다. 1830년 7월 31일에 빠리 시청 앞에 도착한 오를레앙 공작 일행의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정교하고 사실적인 건축물 모형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도 개미같이 작게 제작한 수많은 사람들의 모형이 더 큰 놀라움을 불러일으킨다.

121 전시실
낭만주의 시대 빠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제2공화정 시대였다. 이 전시실에는 빠리 시내의 거리에 이름을 빌려준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가 함께 전시되어 있어 익숙한 이름의 주인공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대표적 인물로는 르드뤼 롤랭(Ledru Rollin), 루이 블랑(Louis Blanc) 등이 있다.

122 전시실
낭만주의 물결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전시실이다. 특히 인상적인 작품은 앵그르의 제자인 독일인 화가 레만(Lehmann)이 그린 ‘프란츠 리스트의 초상(Portrait de Franz Liszt)’이다. 아무런 군더더기 없이 오로지 음악가의 날카롭고 이지적인 표정만을 묘사한 이 작품은 바로크와 낭만주의가 혼재된 뛰어난 걸작이다. 뺄띠에 전시관 1층은 제2제정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빠리의 이모저모를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전시실은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침실을 꾸며놓은 147 전시실이다. 뺄띠에 전시관과 꺄르나발레 전시관을 연결하는 복도에는 20세기 초반의 빠리 풍경을 담은 대형 풍경화와 사실주의, 인상파, 야수파 및 일본 화가들의 다양한 회화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대표작으로는 시냑(Paul Signac)이 점묘화로 그린 ‘예술의 다리(Le Pont des Arts)’라는 풍경화와 알베르 마르께(Albert Marquet)의 ‘눈 덮인 노트르담(Notre Dame sous la Neige)’ 등이 있다.


부대시설 & 주변까페
매표소 앞에 기념품점과 서점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박물관 안내책자는 물론 빠리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다양한 서적이 구비되어 있으며, 아름다운 빠리 풍경을 담은 사진집도 구입할 수 있다. 기념품점에서는 그림엽서와 포스터, 아기자기한 팬시용품도 살 수 있다. 까미유 까페(Camille Café | 주소 : 24, rue des Francs‐Bourgeois, 전화 : 01 42 72 20 50)는 마레의 거리인 프랑 부르주아와 엘제비르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에 자리잡은 우아한 까페이다. 큰 특징은 없지만 비교적 점잖은 차림의 손님들이 주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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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델 미술관

메트로:12호선 팔귀에르(Falguière) 역 하차 | 버스:28, 48, 91, 92, 94, 95, 96번 몽빠르나스 역 하차 가능
10:00~18:00
월, 공휴일
입장료:무료

 

미술관 설립 배경
번잡한 몽빠르나스 역 부근에서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작지만 조용하고 깔끔한 주택가가 나온다. 그 주택가 한쪽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단정한 미술관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부르델 미술관이다. 로댕의 제자였던 조각가 앙뜨완느 부르델(Antoine Bourdelle, 1861~1929)의 작품이 전시된 이 미술관은 부르델이 살던 집과 아뜰리에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더욱 가치가 높은 곳이다. 부르델은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 및 비잔틴 조각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의 대표작인 ‘헤라클레스(Hercule / 오르세 미술관에도 한 점 전시되어 있다)’와 ‘라 프랑스(La France)’ 시리즈는 힘차고 시원시원한 근육질의 조각으로 유명하다. 아름답고 섬세한 여인의 나체 조각보다는 시대 상황과 그 극복을 위한 상징 역할을 하는 대작이 부르델 작품세계의 근간을 이룬다. 1990년대 초반에는 별관을 신축하여 부르델 작품의 전부를 전시하는 토탈 조각미술관으로 성장하였다.

특징
부르델 미술관에는 청동조각, 석고원형, 대리석 조각 등 500여 점에 이르는 부르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안쪽의 대형 전시장에는 부르델의 대표 작품들의 석고원형이 전시되어 있고, 정원 쪽에는 조각가가 생전에 작업을 하던 조각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뒷마당 옆에 딸린 작은 전시실에는 베토벤을 주제로 한 소품과 그의 스승이었던 로댕의 흉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부르델은 유난히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기념하는 대형 조각을 많이 제작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힘(La Force)’, ‘자유(La Liberté)’ ‘공화국(La République)’ 등 애국적 주제를 표현한 대작이 유명하다.

전시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마당에 세워놓은 거대한 청동 조각이 눈에 들어오지만 우선 내부의 전시장을 먼저 둘러보고 완성된 작품을 감상하도록 하자. 전시공간은 모두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부르델의 원래 작업실을 중심으로 배치된 옛 집과 그 옆에 덧대어 지은 대형 전시실, 그리고 마당 건너편에 새로 지은 별채가 있다. 정원에도 대형 청동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어 야외 전시장 역할을 하고 있다. 입구는 대형 전시실이 있는 부속건물 쪽에 있으며, 그 안쪽부터 차례로 관람한 다음 부르델의 아뜰리에 주변을 관람하고 마지막으로 별채의 전시실을 관람하면 된다. 별채는 그라운드 층과 지하에 전시실이 배치되어 있다. 마당에 전시된 거대한 청동작품의 석고원형이 있는 대형 전시실과 부르델의 아뜰리에, 아담 미키에비츠를 위한 기념조각이 전시된 별관 지하 전시실은 반드시 둘러보아야 할 곳이다. 또한 베토벤을 주제로 한 소형 조각 작품이 전시된 14 전시실과 부르델이 수집한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한 15 전시실 및 죽음을 주제로 한 별관 지하 2 전시실도 놓치기 아까운 곳들이다.

주요 전시작품
맨 처음 만나는 전시실은 높은 천장이 인상적인 거대한 대형 전시실(Grande Salle)이다. 드넓은 전시실 여기저기에 배치된 작품은 모두 석고작품으로, 마당에 전시된 청동 완성작품의 원형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전시실 맨 안쪽에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작품은 ‘죽어가는 켄타우로스(Le Centaure Mourant)’이다. ‘로툰다’라고 불리는 거대한 원형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는데 높이가 2.8m에 달하는 대형 작품으로 반인반마인 신화 속의 인물 켄타우로스가 처절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기하학적으로 좌우대칭을 이룬 켄타우로스의 몸체와 오른쪽으로 완전히 꺾어진 고개가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뒤로 젖혀진 손은 리라를 들고 있다. 입구 오른쪽의 거대한 입상은 ‘아기예수에게 봉헌하는 성모마리아(La Vierge a` l'Offrande)’인데, 독일 니더브뤼크 사업가 조합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작품으로, 이집트의 여인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성모마리아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니더브뤼크 사업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자신들의 재산을 지켜준다면 성모상을 세우겠다는 맹세를 신에게 했다고 한다. 니더브뤼크에 세워진 작품은 높이 6m의 석조 동상이다. 성모마리아의 얼굴은 부르델의 딸을 모델로 한 것이며, 성모마리아가 쓴 두건은 부르델의 부인이 늘 쓰고 다니던 스카프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전시실 오른쪽 벽면 부조 앞에 보이는 낯익은 조각은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L'Héraclès Archer)’로,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것과 동일한 작품이다. 부르델의 초기작품에 해당되는데 긴장감 넘치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회화로 치자면 표현주의, 혹은 입체파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불끈 쥔 주먹과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근육, 부릅뜬 눈과 꽉 다문 입술 등 힘센 장사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마치 금방이라도 화살이 날아갈 듯한 긴장된 순간을 표현하고 있다. 그 뒤로 고뇌에 찬 자세로 앉아 있는 여인의 조각은 고대 그리스의 여류시인 ‘사포(Sapho)’를 표현한 작품이다. 부르델이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제작한 마지막 작품으로, 1924년 장식미술 박람회에 출품했던 것이다. 팔꿈치를 괴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여인의 모습은 매끈한 외적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거칠고 생명력이 넘치는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사포와 연장선상에 있는 또 하나의 여인상은 ‘중개인 페넬로페(Pénélope Intermédiaire)’이다. 약간 구부정한 자세의 여인이 한쪽 팔에 다른 한 팔을 받친 채 턱을 괸 모습을 묘사했는데 높이가 2.4m이다. 자신의 첫부인 혹은 여제자를 모델로 한 것이라는 이 작품은 부드럽게 흘러내린 옷자락과 한쪽 무릎을 앞으로 내민 자세 등이 고대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도리아식 기둥 장식과 공통점이 많다. 전시실 왼쪽의 기마상은 ‘알베아르 장군 기념상(Monument au Général Alvéar)’이다. 아르헨티나 독립운동을 이끈 알베아르 장군을 기리기 위해 아르헨티나 정부가 부르델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작품으로 둘레에 ‘승리(La Victoire)’, ‘힘(La Force)’, ‘자유(La Liberté)’ 및 ‘웅변(L'Éloquence)’을 상징하는 네 여신의 조각이 기마상을 수호하고 있다. 곧 앞으로 달려나갈 듯한 말의 모습과 불끈 쥔 주먹을 위로 치켜올리고 독립을 다짐하는 장군의 모습은 20세기 초에 전세계를 뒤흔들었던 민족자결주의의 열기를 상징한다. 전시실 안쪽, 기치창검을 높이 쳐든 거대한 여신상은 ‘라 프랑스(La France)’이다. 1917년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작한 이 작품은 원래 바르똘로메란 조각가가 제작을 담당하였으나 자신이 너무 늙었다고 생각한 그가 부르델에게 다시 맡긴 것이다. 높이 4.6m의 이 여신상은 미술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이다. 전시실 오른쪽 벽에 전시된 부조는 샹젤리제 극장 퍼사드의 윗부분을 장식한 것이다. 1911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아폴로와 그의 명상(Apollon et sa Méditation)’으로, 귀를 통해서가 아니라 청각으로 전해지는 영혼을 통해 지성을 흡수하는 인간상을 추구한다. 대형 전시실 왼쪽 구석 조금 아래쪽에는 두 개의 작은 전시실이 딸려 있다. 3 전시실에는 프랑스의 어느 지방 탄광에서 숨진 광부들을 추모하기 위한 작품이, 4 전시실에는 알베아르 장군 기념상을 제작하기까지의 과정에 해당되는 스케치와 습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대형 전시실 관람을 마치고 정원으로 나서면 조금 전에 보았던 대형 석고 조각 작품을 청동으로 완성한 작품이 늘어서 있다. 건물 회랑 쪽에는 알베아르 장군 기마상의 네 귀퉁이에 세워져 있던 수호여신이 일렬로 늘어서 있으며, 그 사이로 페넬로페가 조금 앞으로 나와 있다. 마당 가운데에는 알베아르 장군이 타던 말이 힘찬 청동조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회랑 안 복도에는 부조와 헤라클레스, 로댕 흉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복도를 지나 왼쪽으로 돌아가면 낡은 나무문이 있어 들어가도 될까 말까 망설이게 되는데 과감히 문을 열어보자. 바로 부르델이 작업하던 옛 아뜰리에이다. 1929년에 부르델이 사망한 이후 전혀 손대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이 아뜰리에에는 부르델이 사용하던 각종 작업도구와 이젤, 찰흙을 반죽하던 긴 작업대와 낡은 의자 등 대가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이 놓여 있다. 조명장치도 새로 설치하지 않아 어둑한 작업실 창 너머로 정원에 세워놓은 몇 점의 청동 조각 작품이 보인다. 작은 뒷마당을 사이에 두고 아뜰리에와 마주보고 있는 전시실로 가면 베토벤을 주제로 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어렸을 때 부르델은 자신의 얼굴이 베토벤과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끊임없이 베토벤의 모습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1887년에 제작한 첫 작품 ‘한 손으로 턱을 괸 베토벤(Beethoven la Joue Appuyée sur une Main)’부터 1929년에 제작한 마지막 작품 ‘비창(Pathétique)’에 이르기까지 부르델은 베토벤을 모델로 한 수많은 두상, 흉상, 마스크를 제작하였다. 대표작으로는 1889년에 제작한 ‘머리가 긴 베토벤(Beethoven aux Grands Cheveux)’, 1908년의 ‘두 손으로 턱을 괸 베토벤(Beethoven aux deux Mains)’ 등이 있으며 ‘베토벤, 또는 메트로폴리탄(Beethoven dit Métropolitain)’이 유명하다. 옆 전시실에는 부르델이 수집한 미술품 컬렉션이 전시되어 있는데, 고대 테라코타 조각과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 작품과 오브제 미술품, 그리고 티치아노, 렘브란트, 앵그르 등 각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회화 컬렉션이 있다. 새로 지은 건물로 연결되는 복도 좌우에는 부르델의 작업모습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어 짧으나마 조각가의 일생을 일별할 수 있다. 지하 1층 포잠박 전시실(Nouvelles Salles Portzamparc)은 아담 미키에비츠에게 헌정된 기념조각상(Monument à Mickiewicz)과 몽토방의 보불전쟁 전사자들 기념조각상(Monument aux Morts de la Guerre de, 1870)이 전시되어 있다. 

부대시설 & 주변까페
매표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서적 가판대가 마련되어 있다. 판형이 큰 도판과 작품 해설서를 구입할 수 있다. 미술관에 구내 까페가 없으므로 가까운 몽빠르나스 대로변으로 나가는 것이 좋다. 이 지역은 빠리에서도 손꼽히는 까페 밀집지역으로, 특히 영화계 인사들이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몽빠르나스 대로에서 가장 유행에 민감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무스탕 까페(Mustang Café / 주소 : 84, bd. du Montparnasse)는 휘황찬란한 간판부터 눈길을 끈다. 미국식 멕시코 요리인 ‘텍스멕스’와 다양한 병맥주를 즐길 수 있으며, 언제나 분위기가 활기차다. 몽빠르나스의 많은 까페, 레스토랑, 브라스리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아마도 이 라 꾸뽈(La Coupole / 주소 : 102, bd. du Montparnasse)일 것이다. 프랑스 영화, 특히 로만 폴란스키가 만든 영화에는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곳은 가장 빠리다운 브라스리로 소문나 있다. 영화계의 거물급 인사들이 자주 찾기 때문인지 빈자리가 거의 없다.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르 돔(Le Dôme / 주소 : 108, bd. du Montparnasse)이 나온다. 길 건너편 6구의 라 로똥드와 마주보고 있는 이 까페는 라 꾸뽈, 라 로똥드, 르 셀렉뜨와 더불어 1920년대에 생겨난 까페이다. 다른 까페와 마찬가지로 작가, 화가들과 더불어 영화계 인사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브라스리풍으로 꾸며진 넓은 실내에는 식사를 할 수 있는 곳과 차를 마실 수 있는 좌석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으며, 생선과 해산물 요리가 일품이다.

주변 볼거리
14구와 15구의 경계지점에 넓게 자리잡은 몽빠르나스 역(Gare Montparnasse / 주소 : Rue du Départ)은 리용 역과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큰 기차역이다. 총 세 개의 터미널이 있으며 프랑스의 서부 지방과 스페인으로 출발하는 TGV 아뜰란띠끄 노선은 제1 터미널을 사용한다. 이곳에서 출발하는 TGV는 은색과 청색이 배합된 세련된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역 바로 앞에 빠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몽빠르나스 타워가 높이 솟아 있고, 남동쪽에는 아름다운 현대식 건축물로 둘러싸인 까딸로뉴 광장(Place Catalogne)이 있다. 이곳은 고답적인 분위기의 여타 광장과는 또 다른 매력을 풍기는 곳이다. 곡선으로 지은 두 채의 건물은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일반 아파트이다. 이 아파트가 원형 극장의 기둥처럼 둥근 잔디밭을 둘러싸고 있어 레 꼴론느(Les Colonnes)라고 불린다. 이 부근의 주택은 까딸로뉴 광장처럼 원형 광장을 중앙에 두고 가장자리에 둥글게 건물을 올린 것이 특징이다. 뻬르 라셰즈 묘지와 더불어 빠리에서 가장 유명한 묘지인 몽빠르나스 묘지(Cimetière de Montparnasse / 주소 : 3, bd. Edgar Quinet)는 몽빠르나스 역 동쪽, 라스빠이 대로와 에드가 뀌네 대로를 끼고 있다. 부르델의 묘가 있는 몽빠르나스 묘지는 19세기 초반 나폴레옹 시대에 조성되었다. 몽빠르나스 묘지는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인 싸르트르와 보봐르의 묘를 비롯한 유명인사들이 많이 잠들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까운 메트로 역은 13호선 게떼(Gaîté)역, 6호선 에드가 뀌네(Edgar Quinet) 역 및 4/6호선이 환승하는 라스빠이(Raspail) 역이다. 산책을 하고 싶으면 좀 소란스럽긴 하지만 몽빠르나스 대로(Boulevard Montparnasse) 쪽으로 나서보자. 그 어느 지역보다도 자유롭고 진보적인 사고를 가진 이들이 많이 찾았던 몽빠르나스는 20세기의 대표적인 문화촌으로 자리매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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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_01

메트로:1호선 빨레 루아얄-뮈제 뒤 루브르(Palais Royal-Musée du Louvre)역 하차 | 버스:21, 24, 27, 39, 48, 68, 69, 72, 81, 95번 루브르 미술관(Musée du Louvre)에서 하차
입장 09:00~18:00(수, 금 22:00까지), 입장권 판매는 17:15, 21:15까지
화, 1월 1일, 5월 1일, 5월 8일, 12월 25일
입장료 : 18:00 이전 9유로, 18:00 이후 6유로, 매월 첫째 일요일 / 7월 14일 무료입장
주의사항:무료 입장시 반드시 소지품 검사를 받아야 한다. 입구에서 엑스레이 투시기로 검사를 하거나 직원이 직접 검사를 하므로 많은 짐을 가지고 가지 않는 것이 좋다 | 패스:적용 | 사진촬영:플래시 없이 가능 | 소지품보관:유리 피라미드 아래에 위치

 

미술관 설립 배경
루브르 미술관 건물은 12세기 말에 필립 오귀스뜨 왕이 요새를 지으면서 건축이 시작되어, 왕궁으로 쓰이게 된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여러 왕조가 건물을 확장해 지금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처음에는 요새로, 나중에는 궁전으로 쓰이던 루브르가 최초로 미술관이 된 것은 1793년으로, 빠리 생활에 싫증을 느낀 루이 16세가 베르사이유에 화려한 궁전을 짓고 거처를 옮긴 뒤였다. 초기에는 왕실이 수집한 각종 미술품을 보관, 전시하는 소극적 의미로서의 미술 전시관이었으나, 나폴레옹이 집권한 이후 수없이 많은 원정전쟁을 통해 지구의 문명을 대표하는 예술품을 때로는 매입하고 혹은 선물로 받거나 대부분은 약탈하면서 대규모 미술관으로서의 루브르가 모습을 갖춰가게 되었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집권하던 1980년대, “르 그랑 루브르(Le Grand Louvre)”라는 프로젝트 아래 2000년대를 대비한 새로운 문화공간으로서 루브르가 갖는 위상을 새로이 정립하기 위해 대대적인 리노베이션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때 12세기의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고, 건축물의 원형을 정확하게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디귿 형태로 세워진 건물 뜰에 거대한 유리 피라미드를 세워 고전과 현대가 공존하는 놀라운 미적 실험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현재 루브르의 중앙 출입구로 사용되는 이 유리 피라미드는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인 I. M. 페이(Ieoh Ming Pei)가 설계한 걸작으로, 1988년 완공된 이후 루브르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완전히 새롭게 하였다. 금속과 유리라는 싸늘한 느낌을 주는 초현대적 재료를 사용하였지만 이 유리 피라미드는 놀랍게도 기존의 루브르 미술관 건물과 완벽에 가까운 조화를 보여준다. 피라미드 가장자리에 조성해 놓은 분수는 밤이면 더욱더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미술관 개관 200주년이 되던 1993년에는 약 36만여 점에 이르는 방대한 소장 작품을 보다 더 많이 전시하기 위해 리슐리외 관의 면적을 두 배로 확장하는 한편 영화 상영과 공연을 할 수 있는 대강당도 새로 설치하여 명실 공히 종합문화센터로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다졌다.

특징
제국주의시대에 약탈했던 문화재가 대부분이나 정치적 권력에는 도덕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파악한 나폴레옹이 수많은 원정전쟁 중에 챙겨온 작품을 프랑스의 공공재산으로 간주하여 오늘날과 같은 뛰어난 미술관의 초석을 닦았다. 루브르 미술관의 전시작품은 인류의 4대 문명의 시원을 나타내는 고고학 유물과 그리스도교 전래 이후의 서양 문명, 중세 예술, 르네상스 예술, 근대 미술 및 극동지역 미술품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밀로의 비너스’와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문명과 ‘보르게제 검투사’, ‘마르셀루스’ 등의 대리석 조각 같은 로마 문명의 작품도 관람객들을 사로잡는다. 고대 문명 작품이 대부분 건축물이나 조각 작품인 데 비해 르네상스를 전후한 서양 미술작품은 단연 회화가 압도적이다. 또한 나폴레옹이 기거하던 저택을 그대로 복원해 놓은 전시실이 있어 당시의 장식미술이 어떠했는가를 간략히 살펴볼 수 있게 배려해 놓았다.
원래 이곳에 있던 19세기 말을 전후한 작품들, 이를테면 낭만파, 신고전주의, 인상파, 후기 인상파 회화작품은 1980년대에 모두 오르세 미술관으로 옮겼다. 루브르 중정원의 유리 피라미드 전시실 루브르 미술관은 리슐리외 관(Richelieu), 쉴리 관(Sully), 드농 관(Denon)의 세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대 이집트, 앗시리아 문명, 그리스 로마 문명, 르네상스 문명, 근·현대 문명 등으로 크게 나뉘어 전시된다. 루브르 미술관 안마당의 유리 피라미드가 제일 큰 출입구이긴 하지만 항상 사람이 많아 오랫동안 줄을 서야 하므로 미술관과 직접 연결된 메트로 역의 통로를 따라가면 곧바로 루브르 미술관에 도착하므로 훨씬 편리하다. 루브르 미술관은 지하, 그라운드 층(레‐드‐쇼쎄), 1층, 2층의 4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층에는 매표소와 역 피라미드, 그리고 각 전시관으로 들어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그 외에 관광정보 안내 사무실과 까페, 음반점, 서점 등의 부대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리슐리외 관 (L'Ailes de Richelieu)
지하층에는 프랑스의 조각과 이슬람의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라운드 층에는 5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방대한 프랑스 조각 작품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다. 그 옆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전시실이 있는데, 함무라비 법전이 새겨진 석판은 4 전시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1층은 중세 실, 르네상스 실, 17세기 실, 나폴레옹 3세 실, 19세기 실 등으로 나뉘어 장식미술품을 두루 전시하고 있다. 특히 르네상스 실과 나폴레옹 3세 실은 호화로움의 극치를 이루는 장식미술의 세계를 보여준다. 리슐리외 관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2층의 회화 전시실이다. 플랑드르 화파와 네덜란드 화파, 독일 및 14~17세기의 프랑스 회화를 전시하는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18 전시실 “메디치 갤러리(Galerie de Médicis)”이다. 플랑드르파의 대표적인 화가인 렘브란트가 마리아 데 메디치(프랑스어로는 마리 드 메디시스)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24점의 대형 그림이 있는데, 야심찬 권력가였던 마리아 데 메디치의 일대기를 힘차게 표현한 작품들이다. 각 작품은 연대순으로 간단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쉴리 관 (L'Ailes de Sully)
가운데가 빈 정사각형의 형태를 한 쉴리 관은 리슐리외 관과 연대순으로 이어져 있는 전시관이다. 지하층에는 중세 루브르 궁전의 모습을 복원한 성채가 있는데, 중세 성벽을 둘러싼 해자(垓字)의 모형이 눈길을 끈다. 그라운드 층에는 고대 이집트, 그리스, 지중해 및 페르시아의 유물을 전시하는데, 그중에서도 12 전시실에 있는 ‘밀로의 비너스’가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작가가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조각상은 가장 완벽한 인체 비율을 구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집트 실(12)에는 람세스 2세의 좌상이 있다. 1층으로 올라가면 그리스의 토기작품과 테라코타, 이집트 유물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리슐리외 관에 이어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오브제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2층은 회화 전시관으로서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프랑스 회화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32 전시실에서는 르 브룅이 알렉산더 대왕의 생애를 주제로 하여 그린 대작이 눈길을 끌고, C 전시실에는 모네, 르느와르, 시슬레 등 인상파 화가들의 소품이 있다.

드농 관 (L'Ailes de Denon)
지하층에는 11~15세기의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조각 작품 및 로마 시대의 이집트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라운드 층에는 에트루리아와 로마의 고대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16~19세기의 이탈리아 조각 작품이 일부 전시되어 있다. B 전시실의 ‘전사 또는 보르게제 검투사’ 조각상은 힘찬 몸놀림과 근육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고대 이탈리아 미술품 중 걸작으로 손꼽힌다. 1층 전시실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양 날개를 뒤로 젖힌 채 비상을 준비하는 듯 한 머리 없는 여신인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이 당당하게 서 있다. 이탈리아 회화 전시실 중 13 전시실은 루브르를 찾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신비한 미소를 띤 채 전시되어 있다. 드농 관 1층의 이탈리아 회화 전시실은 루브르 미술관의 백미로 르네상스 예술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걸작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75 전시실과 77 전시실은 프랑스의 대형 회화작품 전시에 할애된 공간인데 75 전시실의 다비드의 ‘나폴레옹 황제와 조세핀 황제비의 대관식’, 77 전시실의 들라크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주요 전시작품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자그마한 석고 조각 ‘통치자 에비 2세(L'Intendant Ebih II/리슐리외 관 1b 전시실)’는 기원전 2400년경의 것으로 메소포타미아의 셈족 문명을 대표한다. 유프라테스 강 중류에 위치한 마리(Mari)라는 고대 도시의 지배자를 묘사한 이 작품은 양털로 만든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맞잡은 채 여유롭게 미소를 짓는 인자한 지도자의 인상이 특징이다. 현대 조각 작품 못지않은 세련된 조화미와 사실적인 인물의 표정 묘사가 압권인 걸작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함무라비 법전(Code de Hammurabi/리슐리외 관 4 전시실)’은 높이 2.25m의 검정색 현무암에 새겨진 고대 법전으로 1901년에 발굴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수사 지방에서 출토되었는데 원래 바빌론 탑을 장식하던 석판이었으나 12세기경 수사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법전 맨 윗부분에 새겨진 부조는 왕과 신이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 다음 전시실로 가면 거대한 앗시리아의 황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코르사바드의 사르곤 2세 왕궁(Le Palais de Sargon II à Khorsabad)’의 정문을 장식하던 이 황소 조각은 기원전 8세기의 것으로, 의인화된 얼굴 부분이 무척 근엄하고 당당하다. 사르곤 2세는 니느베 부근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거대한 성채를 지었는데 황소는 ‘영혼의 수호자’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오리엔트 문명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페르시아이다. 페르시아 문명 작품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다리우스의 사수(射手 | Les Archers de Darius / 리슐리외 관 12 전시실)’이다. 녹색, 황색, 갈색 벽돌을 모자이크처럼 장식하여 만든 부조로, 수사에 수도를 정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의 왕궁을 장식한 작품이다. 부조에 묘사된 장면은 페르시아 군인들의 모습인데, 화려하고 섬세한 장식의 옷차림과 등에 멘 화살통은 전투에 나가는 군인이라기보다는 의식을 치르는 사제의 모습에 더 가깝다. 세련된 색상과 사실적인 세부 묘사가 압권으로 기원전 5세기의 것이 아니라 마치 현대 미술가가 창조한 뛰어난 예술품같이 느껴진다.
같은 전시실에 있는 장식품 ‘항아리 손잡이(Anse de Vase Achémenidé)’는 페르시아의 장식미술이 얼마나 앞선 것인지를 말해 준다. 말과 나비와 새의 형상을 한데 모은 이 장식은 금과 은으로 만들어져 더욱 화려하다. 대형 스핑크스(Le Grand Sphinx / 쉴리 관 1 전시실)는 루브르의 이집트 문명 전시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높이 183cm, 너비 480cm의 대형 작품이다.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를 조각하여 만든 이 스핑크스는 얼굴은 파라오이고 몸은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원래 스핑크스는 그리스어로 괴물이란 뜻이나, 이집트에서는 신전의 수호신 역할을 한다. 거의 완벽한 보존 상태를 자랑하는 이 스핑크스상 위에는 역대 이집트 왕들이 이름을 새겨놓았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20세기의 아메네마트 2세의 것이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 모습을 그릴 때 얼굴은 측면으로, 몸은 정면으로, 발은 다시 측면으로 그렸는데,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난 작품이 ‘마스타바(Le Mastaba / 쉴리 관 4 전시실)’이다. 석회암에다 붉은색으로 채색하여 완성한 이 부조는 원래 고대의 묘지 안에 있던 작은 신전을 장식하던 것이었다. 죽은 이와 살아 있는 자와의 교신을 상징하는 다양한 장식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을 반영하는 것으로, 각기 다양한 동작을 취하는 사람들의 역동적인 묘사가 압권이다. 그리스의 물질문명을 대표하는 것으로 양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인 ‘암포라(Amphora / 쉴리 관 41, 43, 44 전시실)’를 빼놓을 수 없다. 검정색 바탕에 붉은색 또는 노랑색으로 갖가지 형상을 그려 넣어 장식한 암포라는 처음에는 제례 도구로 사용되다가 차츰 실생활과 관련 있는 다양한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암포라에 그려진 그림은 주로 그리스 신화를 표현한 것이 많으나, 실제 인물의 행동을 묘사한 것도 자주 눈에 띈다. 드농 관의 그라운드 층에서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맨 위에 두 날개를 활짝 펼치고 서 있는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La Victoire de Samothrace)’은 보기만 해도 사람을 압도하는 듯 한 힘이 넘치는 조각이다. 기원전 190년경에 제작된 이 여신상은 머리부분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극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앞으로 활짝 젖힌 몸과 뒤로 펼친 날개가 하늘로 비상하려는 의지를 상징하는 이 여신상은 에게 해의 작은 섬 사모트라케에서 발굴되어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이란 이름이 붙었다.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많은 스포츠용품 브랜드인 나이키(Nike)의 날개 문양은 바로 이 승리의 여신의 날개이다. 두 팔도 없이 비스듬하게 몸을 비틀고 서서 신비로운 미소를 짓는 여신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친숙한 ‘밀로의 비너스(La Vénus de Milo / 쉴리 관 12 전시실)’이다. 약 2m 높이의 이 조각상은 기원전 1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820년에 밀로스 섬에서 출토되어 밀로의 비너스라고 불린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한 천을 감싼 하체와 섬세한 몸을 드러낸 상체 두 부분으로 시선을 분산시키는 이 조각은 특이하게 팔과 다리 모두 왼쪽 부분만이 잘려 나갔다. 고전 양식과 헬레니즘 양식이 적절히 조화된 이 조각은 정교한 세부 묘사와 부드러운 표정 묘사가 특징으로, 고대 그리스 조각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힌다. ‘전사 또는 보르게제 검투사(Guerrier Combattant dit Le Gladiateur Borghèse / 드농 관 다뤼 갤러리)’는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근육을 가진 날렵한 사내가 몸을 반쯤 옆으로 틀고 왼팔을 허공으로 불끈 쥐어 보이는 역동적인 느낌의 조각상이다. 기원전 1세기 초에 에페소스에서 제작된 이 작품은 후에 로마로 전해져 고대 로마 조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근대에 들어서도 수많은 조각가들이 모각을 했던, 인기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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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미술관

메트로:1호선 생‐뽈(Saint‐Paul) 역, 8호선 슈맹 베르(Chemin Vert) 역 하차 | 버스:29, 69, 75, 96번, 특히 29번 버스는 또리니 광장 앞을 통과하는 가장 편리한 노선이다
09:30~17:30(10월 1일~3월 31일), 09:30~18:00(4월 1일~9월 30일)
화, 1월 1일, 12월 25일
입장료:일반 8유로, 할인 6유로, 18세 미만 무료, 매월 첫째 일요일 무료
패스:적용 | 사진촬영:플래시 없이 가능

미술관 설립 배경
꺄르나발레 박물관을 지나 좁은 골목길을 꼬불꼬불 걸어가다가 마주치게 되는 피카소 미술관은 전세계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 중 피카소(1881~1973)의 대표작이 가장 많이 소장된 대표적인 곳이다. 스페인 남부 말라가 출신의 피카소는 젊은 시절 빠리에 정착한 후 20세기를 대표하는 거장이 되었다. 초현실주의와 입체파의 선구자로서 피카소가 현대미술계에 끼친 영향은 그야말로 막대하다. 사회주의적 정치관을 지녔던 피카소는 프랑코의 독재하에 있던 스페인으로 죽을 때까지 돌아가지 않았고 대신 빠리 시민으로 살아가면서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 그가 죽은 후 미망인과 자손들은 엄청난 유산 상속세를 내는 대신 피카소의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였고, 이에 따라 오늘날의 피카소 미술관이 세워지게 되었다. 피카소 미술관이 들어 있는 건물은 살레 저택(L'Hôtel Salé)이라고 하는데, 예전에 소금세를 징수하던 관리들이 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1656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당당하고 우아한 외관과 당시 유명 조각가들이 담당했던 실내장식만으로도 충분한 미술 감상이 될 만큼 구조와 장식이 뛰어나다. 



특징
피카소의 회화 250여 점과 160여 점의 조각 및 200여 점의 꼴라쥬, 부조 작품이 있으며 1,200여 점의 스케치 등이 광범위하게 전시되어 있다. 특히 시대별로 작품이 배치되어 청색시대로 불리는 그의 청년기 작품에서부터 말년의 입체파 작품에 이르기까지 한 예술가의 생애 전체를 따라가며 다양한 예술편력을 엿볼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1901년에 그린 ‘자화상’과 아직은 구체적인 인간의 형태가 남아 있는 ‘해변을 달리는 여인들(1922)’이라는 그림이 있으며, 본격적인 입체파 작품으로는 ‘책 읽는 여인(1932)’과 ‘입맞춤(1969)’ 등이 있다. 그는 작품의 모델과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이 미술관에서는 피카소와 함께했던 여인들의 모습을 그림을 통해 볼 수 있다.

전시실
미술관 건물은 지하를 포함하여 모두 6층이지만 상설전시실은 지하층, 그라운드 층, 1층, 2층에 마련되어 있다. 별채에 있는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본관으로 들어가면 직원들이 현관에서 미술관 안내를 해준다. 다른 미술관과는 달리 이 미술관은 우선 2층으로 올라가 특별전시를 관람한 다음 1층, 그라운드 층의 일부, 지하층을 둘러보고 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그라운드 층 전시실을 둘러보도록 배치되어 있다. 전시실은 모두 20여 개이며, 일단 1 전시실로 들어서면 그 다음부터는 순서대로 둘러보게 되어 있으므로 편리하다. 각 전시실은 시대별, 특징별로 구분돼 있어 피카소의 작품세계가 변화하는 과정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주요 전시작품
1 전시실
피카소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1895년부터 빠리와 바르셀로나를 오가던 1903년까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데, 피카소가 빠리에서 느꼈던 감상적인 느낌과 물질적 어려움은 주로 푸른색으로 표현되었다. ‘몸을 구부리고 누운 나부(잔느 / Nu Couché Jeanne)’는 푸른색을 배경으로 누워 있는 여인이 이마에 한 손을 갖다 댄 포즈를 취하고 있다. 피카소의 친구이자 화가였던 카사제마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친구를 잃은 슬픔은 젊은 피카소의 작품세계를 더욱 깊이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촛불 앞에서 서서히 죽음에 다가가는 친구의 옆모습을 그린 ‘카사제마스의 죽음(Le Mort de Casagemas)’은 빠리에서의 청색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2~3 전시실
빠리에 완전히 정착한 1904년부터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1906년 사이에 완성된 작품들을 전시한다. 몽마르트르 언덕 주변에서 살던 당시, 그곳에 모여 있던 많은 시인, 작가, 화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점차 우울한 빛은 사라지고 대신 따뜻한 붉은색이 작품 여기저기에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 시대를 “핑크시대”라고 부른다. ‘자화상(Autoportrait)’은 피카소가 어떤 여인과 사랑에 빠져 있던 1904년 가을에 그린 작품으로, 잠시 머물렀던 스페인 고졸(Gosol)에서의 영향이 남아 있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띤 작품이다. 과장되리만큼 크게 그린 눈과 굵은 목, 비현실적인 어깨와 가슴 등 마치 조각 작품을 연상시키는 구도가 특징이다. ‘아비뇽의 처녀들’을 완성한 이후 피카소는 입체파 경향을 띤 작품을 본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했다. 브라끄와 더불어 20세기 초반에 미술계의 최대 사건이라 일컬어지는 입체파 운동을 창시한 피카소는 정형화된 대상 표현을 거부하고 정면과 측면을 동시에 파악한 독특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입체파라는 이름은 1908년에 열린 조르쥬 브라끄의 전시회에서 붙여진 것이다.

4 전시실
1911년에 제작한 ‘만돌린을 든 남자(L'Homme à la Mandoline)’에서는 모든 대상이 철저하게 해체되어 추상적인 모습으로 재구성되어 있다. 그 어느 것도 구체적인 사물의 형태를 띠지 않고 완전히 뭉개져 있다. 색상도 회색과 갈색만을 써서 마치 흑백 텔레비전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스타일을 “분석적 입체파” 작품이라고 한다. ‘버들가지로 엮은 의자가 있는 정물(Nature Morte à la Chaise d'Osier)’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회화에 오브제를 포함시킨 작품이다. 타원형 화면을 새끼줄로 감싸고 그 안에 그림을 그린 것인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의자의 구체적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 작품 속의 의자는 버들가지를 꼬아 만든 의자 바닥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5 전시실
피카소의 회화 소장품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피카소가 존경했던 르느와르, 세잔, 앙리 루소 등의 작품과 더불어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마띠스, 브라끄, 드랭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가장 많은 눈길을 끄는 작품은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의 ‘갈색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의 좌상(Jeune Fille Brune Assise)’이다. 모딜리아니의 특징인 꿈꾸는 듯한 눈동자와 기다란 목이 그대로 투영된 이 작품은 피카소의 조용한 느낌을 주는 초기 인물화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브라끄(Georges Braque)의 ‘기타(La Guitare)’는 회화에 종이를 오려 붙이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였는데, 다양한 소재가 서로 겹쳐져서 더욱 입체감을 드러내는 특징이 있다. 20세기 초반에 서양 미술계를 이끌던 또 하나의 유파로는 마띠스를 필두로 한 야수파가 있다. 유파는 다르지만 피카소와 마띠스는 절친한 친구이자 경쟁자로서 1900년대 초반의 미술계를 주도해 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을 열광적으로 수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렌지가 담긴 바구니가 있는 정물(Nature Morte à la Corbeille d'Oranges)’은 피카소가 소장한 일곱 점의 마띠스 컬렉션 중 하나로, 화려한 도자기 그릇에 담긴 오렌지를 그린 것이다.

6 전시실
1918년에 러시아 출신의 올가와 결혼한 피카소는 그 동안의 보헤미안적 생활을 정리하고 안락한 가정생활을 누리는 한편 고상하고 부유한 예술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대를 고전시대(1918~1924)라고 부른다. 6 전시실은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추상성과 입체성에서 완전히 탈피한 구체적인 형태의 인물화가 주를 이룬다. ‘팬파이프를 부는 아이들(La Flute de Pan)’은 단순한 배경과 구체적인 인물 표현이 특징이다. 이보다 더욱 역동적인 ‘해변을 달리는 여인들(Les Femmes Courant à la Plage)’은 작은 크기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대작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7 전시실
초현실주의와 조우하게 된 1925년부터 1929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이 작품들은 설명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난해한 것이 특징이다. ‘입맞춤(Le Baiser)’은 사람의 형태를 전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완전히 해체된 구조와 강렬한 색상이 눈길을 끈다. 이 작품은 입맞춤을 하는 남녀의 모습을 묘사하는 대신 입맞춤하는 순간의 격렬한 감정을 표출한 것으로, 이후 피카소의 특이한 예술세계를 전조(前兆)하는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흰색 바닥(Sur au Fond Blanc)’이라는 작품은 추상성과 단순성이 극도로 강조된 작품이다. ‘소파에 앉은 여인(Femme dans un Fauteuil)’도 이와 비슷한 분위기다.

8 전시실
조각을 회화로 표현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형태 변경(Métamorphoses)’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이곳에 전시된 작품 속의 인물은 도저히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돌을 던지는 여인(Femme Lançant une Pierre)’이라는 작품에서는 오른쪽에 그려진 회색의 돌만 없었다면 이 작품이 도대체 무엇을 나타낸 것인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인물과 배경이 철저히 추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바닷가에 앉은 사람들(Figures à la Mer)’은 조각의 특성을 고스란히 회화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회화와 조각의 중간에 해당되는 새로운 형태의 미술 장르로 인식되고 있다.

9 전시실
피카소에게 가장 창조적인 영감을 준 여성은 마리‐떼레즈였는데, 피카소가 쉰을 바라보던 나이에 만난 그녀는 겨우 열일곱 살의 앳된 소녀였다. 9 전시실은 피카소가 마리‐떼레즈를 모델로 하여 작업한 1930년대 초반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마리‐떼레즈의 개성적인 신체는 피카소의 작품 속에 독특한 형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작품이 ‘여인의 머리(Tête d'une Femme)’이다. 마리‐떼레즈는 달걀형 얼굴에 이마가 튀어 나온 앞짱구였으며 광대뼈가 높이 솟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녀를 모델로 한 이 조각 작품에 그 특징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회화작품인 ‘책 읽는 여인(Femme Lisant)’은 책상에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는 마리‐떼레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데 빨강, 노랑, 초록의 원색이 어린 마리‐떼레즈의 발랄함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10 전시실
프랑코 독재에 분노한 피카소는 1934년에 스페인을 방문한 이래 죽을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그의 작품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스페인 미술이었다. 10 전시실은 이러한 그의 경향을 보여주는 곳으로, 투우로 상징되는 스페인 문화와 십자가로 대표되는 스페인의 가톨릭, 그리고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연상시키는 미노타우루스를 주제로 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La Crucifixion)’는 무리요, 벨라스께스 등 스페인 화가들이 즐겨 다루었던 주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그린 걸작이다. 투우를 주제로 한 ‘코리다(Corrida)’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에너지를 간직한 거대한 소가 말을 향해 뿔을 들이받고 투우사를 죽이는 극적인 장면을 담고 있다.

12 전시실
피카소의 조각을 주로 전시하고 있는데, 그에게 있어 조각은 회화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마리‐떼레즈를 모델로 하여 다양한 조각의 세계를 표현하던 피카소는 석고나 나무와 같은 전통적인 재료뿐만 아니라 금속을 이용한 독특한 작품도 다수 제작하였다. 그중 ‘2월에서 3월까지(Février‐Mars)’는 언뜻 보면 마치 염소가 서 있는 것 같은 모습이지만 사실은 꽃 피는 정원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여자를 묘사한 것이다.

13 전시실
‘뮤즈’라는 부제가 붙은 이 전시실에는 도라 마르(Dora Maar)와 마리‐떼레즈를 모델로 한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다. 뽈 엘뤼아르의 소개로 알게 된 도라 마르는 초현실주의 사진작가이자 예술가들을 후원하던 매력적인 여성이었는데, 피카소와 친해진 다음에는 그의 모델로도 활동했다. ‘도라 마르의 초상(Portrait de Dora Maar)’은 팔걸이가 달린 의자에 앉아 화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으로, 검은 머리와 옷차림에서 강한 개성이 느껴진다. ‘마리‐떼레즈의 초상(Portrait de Marie‐Thérèse)’은 부드러운 곡선과 은은한 중간색을 많이 사용하여 도라 마르의 초상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낸다. 이 무렵 피카소는 마리‐떼레즈와의 사이에 딸을 하나 두었는데, 아마도 아름다운 모델로서가 아니라 모성을 간직한 여성으로서의 마리‐떼레즈를 묘사하고 있다.

16~17 전시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눈에 띄는 작품으로는 ‘부엌(La Cuisine)’과 ‘염소머리, 병 그리고 촛불(Crâne de Chèvre, Bouteille et Bougie)’이 있다. 그 옆의 조그만 17 전시실에는 점토로 만든 조각 작품 ‘염소(Chèvre)’가 있다. 피카소는 1940년대 말부터 1955년까지 프랑스 남부의 시골 마을에서 살았는데, 이 시기에 제작된 조각에는 대부분 염소, 양과 같이 시골에서 기르는 가축이 등장하고 있다. 1955년에 피카소는 프랑스 남부 지중 해안의 꼬뜨 다쥐르 지역으로 이사가 1961년까지 살았는데, 한때는 엑상프로방스에서 가까운 작은 마을의 별장에서 생활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으로는 피카소가 작업하던 깐느의 아뜰리에 이름을 따 그린 ‘캘리포니아 아뜰리에(L'Atelier de la Californie)’가 가장 대표적이다. 1956년에 제작한 이 작품에서는 마띠스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데, 바로 전해에 세상을 떠난 마띠스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무채색으로 칠해진 실내와는 대조적으로 오른쪽 창밖으로는 푸른 종려나무가 보이는 원색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 앞에 놓인 이젤에는 그의 새로운 모델이자 죽을 때까지 그의 곁을 지킨 자끌린느 로끄(Jacqueline Roque)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20 전시실
1961년부터 1973년까지의 피카소의 말년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마지막 전시실이다. 위대한 예술가의 생애가 총집약된 듯한 작품을 전시한 이곳은 피카소 특유의 스타일을 강하게 간직한 작품이 많아 끝없이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다. 강렬한 표현이 돋보이는 ‘투우사(Le Matador)’에는 피카소의 스페인인 기질이 그대로 담겨 있다. 한껏 성장한 투우사의 날카로운 눈빛과 손에 든 창이 거대한 황소와의 대결을 앞둔 긴장된 순간을 잘 표현하고 있다. 배가 잔뜩 나온 늙은 남자의 심술궂은 듯한 표정과 대충 마음대로 칠해 버린 거친 색감의 ‘앉아 있는 늙은 남자(Vieil Homme Assis)’는 인물의 특성을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해 철저히 의도적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남자가 앉아 있는 의자는 마띠스의 작품을 연상시키고, 밀짚모자는 세잔과 반 고흐의 초상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 늙고 무능해진 불행한 남자의 모습을 그렸지만 이상하게도 이 그림은 인생에 대한 관조가 느껴지는 독특한 작품이다. ‘베개를 베고 있는 여자(Femme à l'Oreiller)’는 흰 바탕에 검정색과 회색으로만 표현하여 오로지 인물의 자세와 표정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한 작품이다. 왼팔을 머리에 기댄 채 누워 있는 벌거벗은 여인은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 자끌린느를 모델로 한 것이다. 

부대시설 & 주변까페
본관 앞 별채에 있는 서점 및 기념품점에는 피카소에 관한 다양한 서적이 구비되어 있어 선택의 폭이 넓은 것이 장점이다. 그 밖에 포스터나 그림엽서 등 일반적인 기념품도 구입할 수 있다. 라빠르멍 까페(L'Apparemment Café / 주소 : 18, rue des Coutures Saint‐Gervais)는 피카소 미술관 뒤편에 있으며 심플하고도 모던한 분위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푸짐한 샐러드는 종류에 따라 ?8 ~ ?10, 커피 ?2. 길모퉁이의 작고 조용한 루아얄 바(Royal Bar / 주소 : 19, rue du Parc Royal)는 실내가 비좁아 도로에 테라스 까페를 만들었는데, 거리 역시 너무 좁아 항상 북적댄다. 주변의 까페나 레스토랑이 고급스러워 약간 부담감이 가는 데 비해 이곳은 소박한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는 곳이다. 주변 볼거리 3구와 4구 사이를 이어주는 프랑 부르주아 거리에는 역사적인 유적지가 의외로 많다. 그중 오뗄 수비즈(Hôtel de Soubise / 주소 : 60, rue des Francs‐Bourgeois)에는 ‘프랑스 국립 고문서관(Centre historique des Archives nationales)’과 ‘프랑스 역사 박물관(Musée de l'histoire de France)’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역사 박물관은 특별전시회가 있을 때 외에는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사전에 허락을 받은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으며, 일반인은 안마당까지만 들어갈 수 있다. 고문서관에는 중세 이후의 프랑스의 각종 문서가 보관되어 있으며, 나폴레옹이 남긴 편지가 유명하다. 가까운 메트로 역은 11호선 랑뷔또(Rambuteau) 역. 매혹적인 마레 골목을 돌아보는 것도 빠리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이다. 국립 고문서관을 감싸고 있는 프랑 부르주아 거리와 땅쁠 거리, 악쉬브 거리, 비에이 뒤 땅쁠 거리가 특히 개성이 강하며 꺄르나발레 주변의 세비녜 거리와 뻬이엔느 거리, 엘제비르 거리는 아주 작지만 조용하고 사랑스런 거리이다. 이 거리 곳곳에는 각종 기념품이나 악기를 만드는 소규모 공방이 많이 있고, 대여섯 사람만 들어가면 꽉 찰 듯한 작은 까페가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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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띠유 광장

M1, 5, 8 Bastille

1789년 성난 군중들이 광장 한켠에 있던 감옥을 습격하면서 시작된 대혁명은 그후 몇 년간에 걸친 혼란과 공포 끝에 새로운 시대의 등장을 알리면서 구체제와의 단절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다.(광장의 7월 혁명기념탑은 두번째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바스띠유 광장은 4구, 11구, 12구가 교차하는 교통 중심지로 광장 동쪽의 거대한 오페라 바스띠유와 7월 혁명기념탑을 중심으로 거리가 뻗어나간다. (세계 최초의 철학 카페가 있어 프랑스 특유의 토론문화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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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

메트로:메트로 11호선 랑뷔또(Rambuteau) 역, 1, 4, 7, 11호선 샤뜰레‐레 알(Châtelet‐Les Halles) 역 하차 RER A, B, D선 샤뜰레‐레 알(Châtelet‐Les Halles) 역 하차 | 버스:21, 29, 38, 47, 58, 69, 70, 72, 74, 75, 76, 81, 85, 96번
11:00~22:00(월, 수, 금~일), 미술관, 전시회 11:00~21:00(입장권 판매는 20:00까지), 11:00~23:00목요일, 입장권 판매는 22:00까지 아뜰리에 브랑쿠지 14:00~18:00, Bpi 12:00~22:00(월, 수~금)/11:00~22:00(토, 일, 휴일)
화, 5월 1일
입장료:미술관, 아뜰리에 브랑쿠지 10유로, 할인 8유로, 공연 10유로, 14유로, 매월 첫째 일요일 무료
사진촬영:플래시 없이 가능

 

미술관 설립 배경
1977년에 현대미술의 메카로 불리는 뽕삐두 센터가 들어서기 전까지 보부르는 그저 평범하고 황량한 세느 강변의 한 동네일 뿐이었다. 세계적인 현대 건축가인 영국의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와 이탈리아의 렌초 피아노(Renzo Piano)가 설계한 뽕삐두 센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빠리 시민들의 반응은 분노 그 자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뽕삐두 센터는 안과 겉이 뒤집어진 듯한 건물이다.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같은 승강기는 물론 건물 내에 꼭꼭 숨어 있어야 할 수도관, 가스관, 환기관과 대들보까지 모두 바깥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고철더미 같기도 하고 화학공장 같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뽕삐두 센터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중요 건축물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미술관 뒤로 돌아가보면 바깥으로 나와 있는 파이프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이 칠해져 있는데 이는 미적인 배려뿐만 아니라 기능상의 구분이 가능하도록 해놓은 것이라고 한다. 안전을 뜻하는 노랑색으로 칠해진 파이프에는 전선이 숨겨져 있고, 물을 나타내는 녹색은 수도관, 공기를 뜻하는 파랑색은 환기구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건물 앞에 잠망경처럼 머리를 내밀고 있는 하얀색의 파이프는 환기구를 상징한다.
 
특징
뽕삐두 센터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하여 공공도서관(Bobliothèque publique d'information (Bpi)), 프랑스 문화진흥부, 음악연구소(IRCAM), 영화관, 공연장 등이 있어 미술은 물론 음악, 영화, 무용, 미술교육 등의 업무를 총괄한다. 이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국립현대미술관은 4~5층에 자리잡고 있다. 1905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현대미술 작품의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이 미술관은 루브르 미술관의 고대, 중세, 르네상스의 미술품과 오르세 미술관의 인상파 작품에 이어 연대기적으로 가장 최근의 작품을 전시하는 곳이다. 이 미술관에 작품이 전시된 대표적인 작가로는 마띠스, 샤갈, 피카소, 브라끄, 브랑쿠지, 레제, 루오, 만 레이 등이 있다.
 
부대시설 & 주변까페
뽕삐두 센터의 1, 2, 3층에 위치한 도서관에서는 2,000석의 열람석과 사전, 백과사전, CD 롬 및 지난 5년간 발행된 정기 간행물과 영상자료, 도서를 활용할 수 있으며 인터넷 시설도 구비되어 있다. 월요일, 수~금요일은 12:00~22:00, 토~일요일 및 공휴일은 11:00~22:00에 입장할 수 있으며, 입장료는 없다. 도서관 정보가 필요하면 인터넷(http://www.bpi.fr)을 이용하자. 뽕삐두 센터를 마주한 상태에서 오른쪽을 바라보면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까페가 있다. 항상 예술가, 철학자들이 넘쳐나는 까페 보부르(Café Beaubourg / 주소 : 100, rue Saint Martin)는 20세기 초반에, 서구 사회를 풍미했던 아르누보 양식으로 입구가 꾸며져 있다.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포잠박(Portzamparc)이 설계한 이 까페의 실내는 흰색, 짙은 보라색, 검정색으로 장식되어, 그의 뛰어난 미적 감각을 실감할 수 있다. 점심시간을 전후하여 나오는 브런치 메뉴에는 토스트, 버터, 계란과 베이컨, 치즈에 음료수 등이 딸려 나온다. 뽕삐두 센터 옆에 자리잡은 프레 에 나뛰르(Frais et Nature / 주소 : 3, rue Brantôme)는 작고 소박한 분위기의 저렴한 레스토랑으로 이 부근에서 가장 추천할 만한 곳이다. 이 집은 모두 천연원료만을 사용하는 것이 자랑이자 장점이다. 주로 이탈리아 음식이 나온다. 창 밖으로 뽕삐두 센터의 초현대식 철골 구조물을 덤으로 감상할 수 있다. 주변 볼거리 뽕삐두 센터 서쪽으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포룸 데 알(Forum des Halles) 또는 간단히 줄여서 레 알(Les Halles)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건물은 에밀 졸라가 “빠리의 배”라고 불렀던 중세 이래 프랑스 최대의 시장이었다. 1969년에 빠리 교외인 헝지스(Rungis)로 이전했고 이 자리에는 포룸 데 알이라는 초현대식 복합상가가 들어서게 되었다. 건물을 위로 올리는 대신 지하로 파고 들어가 주변의 전통적인 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초현대식으로 설계하여 다양한 시대의 모습이 공존하게 되었다. 지상 1층, 지하 4층으로 구성된 포룸 데 알에는 지상 출입구만 무려 7군데가 있고, 지하로는 메트로 1, 4, 7, 11호선이 교차하며, RER도 A, B, D호선이 모두 지나가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레 알 쇼핑센터 건너편에 자리잡은 생‐외스따슈 성당(Église Saint‐Eustache / 주소 : 2, impasse St‐Eustache)의 기본 구조는 고딕식, 장식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날카로우면서도 둥그스름한 포용성을 나타내고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과 더불어 빠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손꼽히는 이 성당은 오래된 파이프 오르간과 성가대로 더욱 유명하다. 노트르담 대성당을 기본으로 하여 지어졌기 때문에 내부 장식은 노트르담과 아주 유사하나 높이는 노트르담보다 훨씬 높아 내부에 들어서면 장엄한 느낌이 강하게 든다. 레 알에서 세느 강 쪽을 향해 가다 보면 작은 공원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아름다운 생 자끄 탑(Tour Saint Jacques)을 볼 수 있다. 푸줏간 주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진 생 자끄를 기념하는 이 탑은 화려한 고딕 양식으로 세워졌는데, 원래는 이곳에 있던 옛 성당의 부속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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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떼 섬

빠리를 좌우로 나누는 세느 강 가운데 떠 있는 시떼 섬은 빠리, 아니 프랑스 역사의 요람으로 일컬어진다. 12세기에 노트르담 대성당(Cathédrale Notre Dame)이 세워지기 시작했으며 후에 스테인드글라스로 유명한 생뜨 샤뻴 (Sainte Chapelle) 성당이 들어섰다. (16세기 들어 강변에 다리가 놓이고 좌우안과 자유로운 통행이 가능해지면서 도시 규모도 더욱 확장되었다.) 세느 강을 내려다보며 우뚝 선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는 프랑스 도로 측정의 기준점이 되는 제로 포인트(Le Point du Zéro de Paris)가 새겨져 있으며 섬 북서쪽은 대법원(Palais de la Justice)과 생뜨 샤뻴이 있고 주변에 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꽃시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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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궁전

베르사유까지는 RER C5선 베르사유‐리브‐고슈(Versailles‐Rive‐Gauche) 역을 가는 RER을 타고 종점에서 하차하는 방법이 제일 편리하다. 앵발리드 역에서부터 약 30분 정도 걸리며 VICK라는 이름을 가진 RER이다. 유레일패스 이용 가능 구간이므로 기차역이나 SNCF 구간의 RER 역에서 유레일패스를 보여주고 티켓을 받으면 된다. 그밖에 생 라자르 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베르사유‐리브‐드르와뜨(Versailles‐Rive‐Droite) 역에서, 몽파르나스 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베르사유 샹띠에(Versailles‐Chantiers) 역에서 하차하면 된다. 직접 차를 몰고 갈 경우 A13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 출구나 RN 10 뽀르뜨 드 생 끌루(Porte de Saint Cloud)에서 나가면 된다. 파리에서부터 약 16㎞ 떨어져 있는 곳으로 소요시간은 30~45분 걸린다.
궁전 화~일 11월~3월 09:00~17:30, 4월~10월 09:00~18:30
월요일
입장료:14유로, 하절기 16:00~, 동절기 15:00~ 10유로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곳이 바로 이 베르사유 궁전이다. 본래 사냥터인 이곳을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으로 만든 이는 태양왕으로 불렸던 루이 14세다. 3만 명의 일꾼을 동원하여 16세기에 본격적으로 축조한 것으로, 당시 프랑스의 강력했던 왕권과 사치를 보여주는 곳이다. 부르봉가(家)의 마지막 왕인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함으로써 베르사유와 왕가의 관계도 끊어진다. 이곳의 정원들은 전형적인 프랑스식으로, 봄이면 잘 정리된 정원과 분수, 시원스레 뻗은 운하가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이곳의 정원은 매우 넓어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면 궁전에서 멀리 떨어진 정원까지 감상할 수 있다. 실제로 자전거를 빌려주는 곳도 있고 정원을 한 바퀴 도는 꼬마기차도 운행하고 있다. 정원에는 17세기의 프랑스 궁전인 그랑 트리아농과 18세기의 궁전인 쁘띠 트리아농이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베르사유 궁전이 당시 발르와가의 경쟁상대인 합스부르크가의 궁전인 쇤부른 궁전과 반대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1624년에 루이 13세에 의해서 사냥터의 집들이 만들어져 1668년에 왕의 건축가인 루이 르 보가 조그만 성과 정원을 짓기 시작한 것이 현재 성의 기초가 된다. 루이 14세는 성을 더 크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곳으로 만들었으며, 1682년 4월에 베르사유를 그의 수도로 정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쥘 아르두앵 망사르는 거울의 방과 남쪽의 두 개의 건물과 북쪽의 건물들을 증축하였다. 고블랭 공방과 왕실 아카데미 출신인 꼴베르와 르 브렝은 가구와 장식 등을 고풍스럽게 하였다. 이후 루이 15세의 통치기간 동안에는 성이 바뀌지 않았다. 그러다가 루이 16세의 통치기간에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했다. 루이 16세와 루이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에 올라가야 했고, 이후 19세기에 루이 필립에 의해 궁전은 프랑스 스타일의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참고로 베르사유는 전형적인 일본식 발음으로 현지에서는 ‘벡사이’에 가깝게 발음한다. 인포메이션 성문 입구 오른쪽에 여행 안내소가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다.

관광 포인트
성은 크게 왕궁과 수많은 부속건물, 대연회장, 화려한 침실, 17세기에 조성된 정교한 프랑스식 정원, 2개의 별궁인 그랑 트리아농과 쁘띠 트리아농, 그리고 농촌 마을인 왕비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배치와 정원 조경은 건축 당시와 비교해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랑 아빠르뜨망(Grands Appartements)
매표소를 지나 나오는 헤라클레스의 방을 지나면 보이는 일곱 개의 방이 있는 건물이다. 1637년부터 1682년까지 르 브렝이 작업을 하였는데, 방으로 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대사의 계단은 그 화려함에 있어서 거울의 방과 맞먹는 수준으로 역시 르 브렝이 작업을 한 곳이다. 아봉당스 살롱(Salon de l‘Abondance)은 루이 14세의 게임방이라고 알려진 곳으로, 이곳에 있는 값비싼 것들은 루이 14세가 모은 것이다. 왕은 이곳에서 음식과 차를 즐겼으며, 월, 수, 목요일 저녁에는 6시부터 10시까지 이곳에서 여가를 즐겼다. 비너스의 방(Salon de Vénus)은 대사의 계단과 동일한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곳에서 왕들은 간단한 간식을 즐겼는데, 천장에는 르베 앙뜨완 우와쓰가 그린 ‘여신의 사랑’이 그려져 있다. 디안의 방(Salon de Diane)에서 루이 14세는 당구를 즐겼다. 이 방은 여신 다이애나의 이야기로 장식되어 있으며, 베르니니가 만든 루이 14세의 흉상이 있다. 마르스의 방(Salon de Mars)은 1782년까지는 경비원 방으로 쓰였다. 벽난로 위에 결려있는 그림은 다비드로, 1794년에 도메니키노가 그렸다. 왕이 가장 좋아하던 그림이었으며, 본래 왕의 침실에 걸려있었다. 메르쿠리우스의 방(Salon de Mercure)은 본래 대기실로 사용되었다. 1715년 9월 2일 루이 14세가 죽었을 때 그의 관은 일주일 동안 이곳에 놓여졌고 72명의 기도자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하였다. 천장의 그림은 장 밥티스트 드 샹뻬뉴가 그린 것이다. 아폴론의 방(Salon d'Apollon)은 군주의 방(Salle du Trône)으로도 불린다. 이곳에서 대사를 임명하였다. 천장의 그림은 ‘태양의 전차 아폴로’라는 그림으로 라 포쓰가 그렸다.

거울의 방(Galerie des Glaces)
거울의 방은 전쟁의 방(Salon de la Guerre)을 지나면 나오는 곳으로, 베르사유 궁에서 가장 유명한 방이다. 이곳에서 내다보는 정원의 풍경은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 1687년에 쥘 아르두앵 망사르가 설계하였으며, 정교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이곳에서 외국 귀빈을 맞이하였다. 가로 75m, 세로 10.5m, 높이 12.30m의 방에는 17개의 큰 거울이 각 벽을 마주보고 걸려있으며 17개의 큰 거울은 다시 578개의 작은 거울로 구성되어 있다. 17개의 거울의 의미는 루이 14세 초기 통치 17년 동안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며 왕들은 이 방에서 노을 감상을 즐겨 했다. 천장의 그림은 루이 14세의 생활과 전쟁에서 승리한 모습으로 1678년 니메겐 조약 전까지를 르 브렝이 그렸다. 오늘의 독일이 태어난 배경이 된 이 방은 프러시아의 왕이 빌헬름 1세라는 이름으로 대관식을 하고 독일제국 선포식을 한 곳이기도 하다. 

아빠르뜨망 드 라 렌(Appartement de la Reine)
여왕을 위한 곳으로, 루이 14세가 부인인 마리 떼레즈를 위해 지었다. 이곳은 4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왕비들이 계속 사용해 왔다. 모든 방들이 조화가 되는 그랑 아빠르뜨망과는 달리 아빠르뜨망 드 라 렌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왕비의 방(Chambre de la Reine)은 본래 마리 떼레즈를 위해 장식되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고, 현재의 장식은 1730년부터 1735까지 마리아 레친스카를 위해 옮긴 것들이다. 문 위의 그림 속의 5명의 아이들은 마리아 레친스카의 자녀들이다. 문은 루이 15세 때 로코코 양식으로 제작되었으며, 1770년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방을 다시 장식하였다. 귀족의 살롱(Salon des Nobles de la Reine)은 본래 마리 떼레즈의 방으로 가기 위한 대기실이었으나 왕비가 그림 그리는 방으로 바뀌었다가 마리아 레친스카 때 여왕 접견실로 바뀌었다. 성스러운 방(Salle du Sacre)은 본래 성에서 세 번째 기도실로 쓰이던 곳이었는데, 1682년에 경비병 방으로 변경되었다. 국회가 열리는 날이면 의원들은 이곳으로 공지를 읽고 입장하였다. 1837년에 박물관으로 변경되면서 루이 필립이 이곳에다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 ‘샹 드 막스의 독수리(Champ de Mars Eagle)’ 그로의 ‘아부키르 전투’ 등의 그림을 모아다 놓았다.

전쟁의 방(Salon de la Guerre)
전쟁의 방은 1837년에 루이 필립의 설계로 프랑스 역사박물관으로 지어졌으나 나폴레옹의 측근들이 전투 화랑으로 바꾸었다. 이 방에 있는 그림들은 역사상 프랑스가 승리한 내용으로, 오라스 베르네,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포함하여 33기의 큰 화폭에 클로비스로부터 나폴레옹 1세까지의 전쟁 모습이 담겨져 있다.

그랑 트리아농(Grand Trianon)
그랑 트리아농은 베르사유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성 중에서 큰 건물이다. 분홍색 대리석으로 지어진 이곳은 루이 14세의 정부였던 멩트농 부인과의 밀회를 즐기기 위해 지어졌다. 트리아농은 1668년에 루이 14세가 휴양을 위해 사들인 마을의 이름이다. 1670년에 르 보에가 건축하였고, 델프 바르에 의해 파란색 타일로 장식되었다. 1687년에 산 위에 있어 성 가까이에 머물 수 있는 곳으로 다시 지을 것을 결정하고 망사르가 이를 실행하여 그랑 트리아농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이곳은 왕들이 잠깐씩 쉬는 성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나폴레옹 1세 때 개수되었다.

쁘띠 트리아농(Petit Trianon)
쁘띠 트리아농은 그랑 트리아농과 여왕의 오두막 사이에 있으며, 1761년 루이 15세 때 요양소로 사용하기 위해 프랑스식 정원 스타일로 지어졌다. 이후 루이 16세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주었으며, 그녀는 파리의 왕의 정원에서 나무들을 옮겨다 심었다. 영국식과 중국식 정원을 혼합한 형태고, 근처에 사랑의 신전이 있다.

왕비의 작은 마을(Hameau de la Reine)
왕비의 작은 마을은 아름다운 시골 마을로 궁정 생활에 지루함을 느낀 마리 앙투아네트가 농촌 생활을 하고자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집들은 노르망디의 집을 모델로 해서 지었으며, 1783년부터 1785년까지 12개의 집이 지어졌다. 여왕의 오두막은 물레방앗간, 말보로 탑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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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르본느 대학

M Cluny la Sorbonne

 

프랑스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대학인 소르본느는 현재 파리 제4대학으로 불리고 있으며 팡떼옹(Panthéon)과 중세 박물관(Musée National du Moyen Âge)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소르본느라는 이름은 이 대학의 창시자인 로베르 드 소르봉(Robert de Sorbon)이라는 성직자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죽은 후 성인이 되어 ‘생 루이’라고 불리는 성왕 루이 9세의 고해 신부였던 로베르 드 소르봉은 1253년 가난한 16명의 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설립했다. 소르본느는 서양 중세 학문의 본거지가 되어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신학 연구의 전당이 되었다. 처음에는 신학만을 강의했으나 학교의 규모가 커지고 학생수도 많아지면서 철학, 수사학 등으로 학문의 영역이 넓어져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과 함께 유럽 3대 대학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소르본느에서 공부하던 학생들과 교수들이 라틴어로 대화를 한 데서 이 지역에 라틴 구역(Cartier Latin)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소르본느는 가톨릭 신학만을 정통으로 인정하는 교조주의적인 단점이 있었다. 100년 전쟁 동안에는 부르고뉴와 영국 편을 들었으며 마녀재판을 통해 프랑스 왕실을 구한 잔 다르크를 화형대로 보내는 데 앞장서기도 했던 것. 계몽시대에 접어든 18세기에 소르본느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당시의 자유로운 철학사상을 반대하고 모든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을 비판하는 등 보수주의적인 면모를 보였기 때문에 프랑스 대혁명시 혁명세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이후 나폴레옹 집권 시기에 다시 문을 열었으며 1968년의 프랑스 학제 개편에 따라 파리 대학의 일원인 파리 제4대학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파리 시내의 대학 중 파리 4대학이 가장 보수적인 학풍을 지니고 있다는 점. 소르본느가 배출해 낸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고 중세 최대의 연애 스캔들의 주인공인 아벨라르도 이곳에서 신학을 강의한 바 있다. 현재 소르본느 대학은 문학, 철학, 사회학 등 인문 사회과학 분야를 중심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있으며 22개의 강의실과 22개의 세미나실, 두 곳의 교내 박물관 등 완벽한 시설을 갖춘 고풍스러운 도서관이 있다. 대학 정면에 당당하게 서 있는 건물 소르본느 성당(Église de la Sorbonne)의 화려한 돔 지붕이 영광스러웠던 지난날의 소르본느 대학을 상징하고 있다. 2000년도에는 소르본느 대학 앞 광장에 새롭게 분수대를 설치해 학생들과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학생이 아니면 학교 내부에는 출입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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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상드르 3세 교, 퐁 알렉상드르 트로아

M Invalides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1896년부터 2년간 세운 알렉상드르 3세 교는 8구의 그랑 팔레 미술관(Grand Palais)과 앵발리드(Invalides) 앞의 에스쁠라나드 데 쟁발리드(Esplanade des Invalides)를 연결하는 다리로 센느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중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손꼽힌다. 강에 기둥을 세우지 않고 다리 양쪽 끝을 축으로 하는 아치형의 다리로, 강변 양쪽에 두 개씩 세워진 거대한 기둥이 인상적이다. 각각의 기둥 위에는 황금색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으며 아르누보 양식의 화려하고 우아한 가로등이 다리의 모습을 더욱 아름답게 해준다. 그랑 팔레의 화려한 지붕과 알렉상드르 3세 교의 황금색 조각, 그리고 앵발리드 내 돔 성당의 장엄한 돔 지붕이 빚어내는 조화로운 아름다움은 특히 야간에 조명을 받을 때 더욱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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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크레 꾀르 대성당

층층이 놓인 계단 위에 서 있는 순백의 대성당은 둥글고 거대한 돔과 섬세한 장식이 인상적인 비잔틴 양식의 성당이다. 노트르담 대성당과 같은 고딕식 성당은 까떼드랄(Cathédrale)이라고 부르고 비잔틴 양식의 성당은 바질리끄(Basilique)라고 부른다. 1870년 프러시아가 프랑스를 침략하자 불안에 떨던 가톨릭교도들이 프랑스의 승리를 기원하면서 한푼 두푼 모은 돈을 예수 성심의 날에 바치기로 하고 짓게 된 것이 바로 사크레 꾀르 대성당이었던 것. 사크레 꾀르라는 말은 ‘성스러운 마음(聖心)’이라는 뜻. 그 마음이 통했던지 프랑스는 엄청난 손실을 입기는 했으나 4개월간 함락되었던 파리를 되찾을 수 있었고 3년 후에는 본당이 무사히 완공되었다. 대성당 정면은 그리스도의 일생을 묘사한 부조로 장식되어 있고 정문 위에는 잔 다르크와 루이 9세의 청동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그 위의 지붕 바로 아래에는 성심을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이 벽감 안에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황금색 바탕의 화려한 모자이크가 보이는데 제단 뒤 거대한 아치형 벽면을 두루 감싼 이 모자이크화는 승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 것이다. 사크레 꾀르 대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타원형의 돔이다. 성당 중앙에 높이 솟은 이 돔은 비늘 모양의 빗살무늬가 나 있으며 안쪽으로는 발코니가 있어 스테인드글라스가 장식된 화려한 성당 내부를 볼 수 있다. 돔 뒤편에 높이 서 있는 종탑은 높이가 80m에 달한다. 특히 정문 앞의 테라스와 작은 공원은 파리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사크레 꾀르 대성당은 해질 무렵 석양에 물드는 모습이 특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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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발리드

M La tour Maubourg, Varenne, Invalides
하절기 10:00~18:00, 동절기 10:00~17:00
7~9월 제외한 매주 첫째 월요일, 1월 1일, 5월 1일, 11월 1일, 12월 25일
입장료 : 성인 8유로, 26세 이하 6유로, 18세 이하 무료
패스 : 적용

 

앵발리드(Hôtel des Invalides)
알렉상드르 교(Pont Alexandre III)를 건너 센느 강 남쪽으로 접어들면 광활한 대지 위에 아름답게 조성된 잔디가 시원함을 더해주는 에스쁠라나드 데 쟁발리드(Esplanade des Invalides)가 펼쳐져 있고 그 뒤로 앵발리드의 웅장한 모습이 당당한 모습을 뽐내며 서 있다. 한가운데 우뚝 솟은 둥근 지붕은 나폴레옹이 잠들어 있는 돔 성당의 지붕이다. 앵발리드란 ‘상이군인, 부상 입은 자’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 말로서 루이 14세가 통치하기 전까지 프랑스에는 상이군인을 위한 시설이 없었다. 1671년 루이 14세는 왕국을 위해 부상을 입은 퇴역병사들을 위한 안식처를 짓기로 하고 당시의 유명한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겼다. 앵발리드가 완공된 것은 1676년이었으나 첫 부상병은 1674년에 이곳에 입주할 수 있었다. 완공된 지 1년 후 병사들의 성당을 짓기 시작하였고 그 뒤를 이어 돔 성당이 세워졌다. 초기에 앵발리드는 종교기관과 군사기관에서 운영을 담당하였으며 이곳에 거처를 둔 상이군인들과 퇴역군인의 수는 무려 4,000여 명에 이르러 하나의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자갈을 깔거나 태피스트리를 짜는 등 사회적응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기하학적으로 설계된 잔디밭 위에 돔 성당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대칭으로 배치된 앵발리드는 건축물의 아름다움도 물론 뛰어나지만 규모가 어마어마한 것이 특징이다. 단일 건물로는 센느 강 남쪽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앵발리드를 중심으로 에펠탑(La Tour Eiffel), 로댕 미술관(Musée Rodin), 유네스코 본부 등이 주변에 자리를 잡고 있다. 요새처럼 꾸며진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양쪽 건물에 군사 박물관이 들어서 있고 그 뒤로 규모가 작은 병사들의 성당인 생 루이 데 쟁발리드 성당(Église Saint Louis des Invalides)이 있으며 담 너머로는 나폴레옹의 묘가 자리하고 있는 돔 성당(Église du Dome)이 있다. 
 

군사 박물관(Musée de l'Armée)
군대와 전쟁에 관련된 박물관 중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군사 박물관은 무기와 전쟁 관련 유적을 전시하는 서관과 루이 14세 시대부터 나폴레옹 3세 시대까지의 전쟁의 역사를 보여주는 동관 등 두 곳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관의 레 드 쇼쎄(한국의 1층)에는 고대로부터 17세기에 이르는 서유럽 전쟁의 역사를 증명하는 각종 무기, 갑옷, 투구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프랑수아 1세 전시실, 앙리 4세 전시실, 루이 13세 전시실 등 왕조에 따라 구분된 전시실이 있다. 가장 특이한 전시실은 16~18세기의 중국과 일본 무사들의 갑옷을 전시하는 동양 전시실이다. 아쉽게도 한국의 물품은 거의 선보이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이었던 1914~1918년 사이의 군사 관련 전시실과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던 1939~1945년 사이의 군사 관련 전시실이 있다. 이 중 제2차 세계대전 전시실은 전쟁 중 프랑스인들이 벌여온 다양한 레지스탕스 활동상황을 보여주는 문서, 회화,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영상 자료를 통해 당시의 끔찍한 전쟁 양상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곳은 유태인 학살을 증언하는 각종 자료를 전시하는 공간이다.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오면 실물 크기의 대포를 비롯한 무기 모형을 전시하는 포대 전시실이 있다. 안마당을 가로질러 동관으로 가면 레 드 쇼쎄에는 루이 14세 시대부터 20세기까지 각 부대를 상징했던 깃발과 부대의 상징물 등을 전시하는 뛰렌느 전시실이 있다. 이곳에는 나폴레옹 시대에 제정된 빨간색, 하얀색, 파란색의 프랑스 삼색기의 원형이 전시되어 있다. 동관 2층과 3층은 루이 14세 시대부터 나폴레옹 3세 시대까지 연대별로 프랑스 군대사를 일별할 수 있도록 전시실을 배치해 두었다. 이 중 가장 인상적인 전시실은 프랑스 대혁명과 제정시대의 유물을 전시한 곳으로 약 20여 개의 전시실에 1789년부터 1815년 사이의 프랑스의 해외원정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동관과 서관 사이의 안마당에서 들어갈 수 있는 생 루이 데 쟁발리드 성당은 규모는 작으나 고전적인 건축 양식을 완벽하게 활용한 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다. 회랑 양옆으로는 19~20세기에 적군들로부터 뺏은 깃발이 죽 걸려있으며 1679년 제작된 오르간 케이스도 독특한 디자인으로 눈길을 끈다.  

돔성당(Église du Dôme)
미로처럼 난 건물의 주랑을 따라 뒤로 돌아가야 돔 성당에 들어갈 수 있다. 곳곳에 화살표로 표시해 두었으므로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돔 성당은 1677년에 아르두앵 망사르의 감독 하에 건축을 시작했다. 높이가 107m나 되는 당시로서는 굉장한 높이의 이 성당은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에게 헌정된 최대 규모의 성당이다. 이곳에는 나폴레옹 황제의 묘는 물론 뛰렌느, 포방, 포쉬, 조젭 보나파르트, 제롬 보나파르트 등의 가족묘도 함께 있다. 성당 가운데 부분을 뚫어 지하에 안치한 나폴레옹의 관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둥글게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가면 붉은색 반암으로 만든 거대한 나폴레옹 황제의 묘가 초록색 대리석 제단 위에 당당하게 세워져 있다. 그 주위로는 황제의 영광을 상징하는 부조가 둘러싸고 있고 중앙의 안치대 위에는 황제의 문장을 지니고 있는 나폴레옹 조각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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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르뜨르 광장

사크레 꾀르 대성당 서쪽으로 난 길로 따라 들어서면 작은 광장이 눈에 띈다. 이곳까지 이르는 작은 골목길에는 기념품점과 무명작가들의 그림을 파는 숍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관광객들의 눈을 당긴다. 떼르뜨르 광장에 들어서면 파리 안에 있는 화가들이 다 이곳에 모여들었나 싶을 만큼 많은 거리의 화가들이 자신의 그림을 판매하거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원래 이곳은 생 삐에르 드 몽마르트르 성당에 부속되어 있던 곳으로 이단 재판시대에는 처형장으로 쓰인 적도 있었다. 19세기에 몽마르트르로 이주해 온 화가들이 모임을 갖고 예술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화상들과 작품을 거래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진 이 광장은 보헤미안풍이 그대로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지역이다. 또한 이 광장을 중심으로 사방에 빽빽이 카페들이 자리 잡고 있다. 맘에 드는 카페에 앉아 흘러간 몽마르트르의 예술가들을 떠올리며 잠시 상념에 잠겨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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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가지 베르시

신시가지 베르시(Bercy)

파리를 오랜 기간 동안 구경하다 보면 서울의 높다란 건물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오래된 건물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그들의 집념이 훌륭하다 싶다가도 조금 지저분한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거나 히터나 에어컨이 별 소용이 없는 집에서 생활하다 보면 모던한 건물의 깔끔함이 그리워진다. 하지만 파리 시내만 둘러보고 프랑스라는 나라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면 큰 오산이다. 12~13구에 자리 잡은 신시가지 베르시를 찾아가면 전형적인 파리의 모습이 아닌 색다른 모습의 파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시(Bercy)
예전에 이곳은 와인을 모아놓는 거대한 창고였다. 하지만 최근에 점차 개발되어 현재 경제부가 이곳에 있으며 각종 문화와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차츰 늘어나고 있다.

파리‐베르시 스포츠 경기장(Palais Omnisports de Paris‐Bercy)
22가지 이상의 경기를 할 수 있는 대형 스포츠 스타디움으로 각종 유명 경기는 물론 유명 가수의 공연도 자주 이루어진다. 베르시 공원(Parc de Bercy) 베르시에는 넓고 아름다운 정원이 마련되어 있어 주말에 산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모두 8개의 정원을 가지고 있으며 작은 호수까지 있어서 물새들을 구경할 수도 있는 곳. 구름다리를 건너 천천히 걷다 보면 작은 포도밭도 만날 수 있다.



꾸르 생떼밀리옹(Cour St‐Émilion)
베르시 빌라주(Bercy Village)라고 불리는 이곳은 예전에는 각 지방의 와인들이 모이는 와인 무역의 중심지였다. 지금 이곳의 넓은 공간 중 일부는 베르시 공원으로 조성되었고 각종 와인을 저장해 두었던 여러 건축물들은 개축을 거듭해서 하나의 와인 바 거리가 되었다. 이곳에 들어서면 마치 어느 놀이공원에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아름답게 바뀌어 있으며 대부분이 레스토랑이나 와인 바로 변모되었다. 파리의 보보스 족들은 저녁 무렵이 되면 이 아름다운 거리의 고급 레스토랑을 찾아 와인 한 잔을 마시며 친구들과의 만남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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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떼옹

M Cardinal Lémoine,Cluny la Sorbonne
하절기 10:00~18:30, 동절기 10:00~18:00(45분전부터 입장마감)
1월 1일, 5월 1일, 12월 25일
입장료:성인 8유로, 18‐25세 5유로, 미술사나 건축사전공학생은 무료

 

뤽상부르그 공원(Jardin du Luxembourg)과 마주보고 있는 수플로 거리 끝에 웅장하게 세워진 팡떼옹은 수플로가 설계한 거대한 돔이 인상적인 파리의 대표적인 기념물이다. 둥근 돔을 중심으로 십자가형으로 설계된 팡떼옹은 병중이던 루이 15세가 완쾌되기만 한다면 센느 강 남쪽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짓겠다는 맹세를 지키기 위해 1789년 대혁명 직전에 완공하게 되었다. 네오클래식 양식으로 지은 이 팡떼옹은 높이가 무려 83m로 당시 파리 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반쯤 허물어진 생뜨 주느비에브 수도원 자리에 세워진 팡떼옹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을 적절히 접목시켜 당시로서는 최신의 스타일을 구사하였다. 원래는 성당으로 지었으나 대혁명 이후 구성된 국민공의회에서 프랑스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게 헌당하기로 결정하여 ‘만신전’이라는 뜻의 팡떼옹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는 로마의 팡떼옹을 본뜬 것으로 특정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곳에서 1855년에 레옹 푸코(Léon Foucault)가 높이 67m의 대형 추를 설치해 지구의 자전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바 있다. 푸코가 사용한 추는 지금 기술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팡떼옹에는 푸코의 추 실험을 기념하는 새로운 추가 매달려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시간의 각도에 따라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다. 실내 곳곳에 장치된 오디오 시설을 통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데 무료이며 영어와 프랑스어로 설명이 나온다. 지하는 프랑스의 위인들이 잠든 국립묘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곳으로 볼테르, 루소, 위고, 졸라 등 이성과 계몽시대를 살다 간 프랑스의 선각자들과 피에르와 마리 퀴리 부부 같은 과학자는 물론 세계 평화를 위해 헌신한 철학자, 정치가들과 레지스탕스의 영웅 등이 잠들어 있다. 몇 년 전에는 앙가주망 문학의 거봉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이곳으로 자신의 무덤을 옮길 수 있었다. 팡떼옹에 묻히기 위해서는 지성적인 인물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 참여도가 큰 인물이 되어야 하는데 그 심사를 통과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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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가르니에 극장

M3, 7, 8 Opéra, RER A Auber
10:00~17:00, 투어 화~일 14:00
일반 8유로, 할인 4유로, 가이드 투어 일반 12유로, 60세 이상 10유로, 학생 9유로. 공연요금은 프로그램에 따라 다름

 

뒤로는 프랑스 최대의 두 백화점인 갈르리 라파예트(Galeries Lafayette)와 쁘렝땅 백화점(Au Printemps)을 거느리고 앞으로는 화려한 네오클래식풍의 건물로 둘러싸인 넓은 광장과 그랑 불르바르(Grand Boulevard)가 펼쳐져 있는 한가운데에 당당하게 서 있는 파리 오페라 극장은 화사한 옷차림을 한 귀부인들 가운데 오만하게 서 있는 여왕의 풍모를 하고 있다. 정교하게 깎은 대리석과 번쩍이는 금빛을 입힌 이 거대한 극장은 왕궁처럼 보이는 외형 때문에 설계자의 이름을 따 가르니에 궁전(Palais Garnier)이라고도 불린다. 프랑스 제2 제정을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손꼽히는 오페라 극장은 오스망 남작이 1800년대 초에 도시계획을 세울 때부터 프랑스를 대표하는 극장을 이곳에 건립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완벽하다 싶을 만큼 주변 지역과 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다. 오페라 극장의 설계자는 공모전을 통해 당선된 당시 35세의 젊은 무명 건축가인 샤를 가르니에(Charles Garnier)였다. 1862년 공사에 들어간 오페라 극장은 지형적인 문제와 전쟁 등으로 인하여 근대에 이루어진 공사인데도 완공하는데 10년 이상의 세월이 소요되어 마침내 1875년에 문을 열게 되었다. 이 극장은 루이 14세가 1669년 설립한 파리 오페라단의 13번째 전용극장으로 규모와 내부 구조가 엄청나게 크고 복잡하다. 런던 웨스트엔드의 롱런 히트 뮤지컬인 ‘오페라의 유령’의 무대가 된 극장이 바로 이 오페라 가르니에다. 극장의 총 길이가 무려 173m에 달하며 극장 지붕을 장식하는 아폴로 동상까지의 높이는 73.6m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극장이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엄청나게 크고 화려한 계단이 나온다. 오페라 극장 내에서 가장 유명한 곳인 이 계단은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단의 방향이 양쪽으로 뻗어나가 극장의 로비와 위층의 객석에 이어져 있다. 화려하게 조각된 샹들리에는 그 규모와 번쩍거리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천박하게 보이기보다는 장중한 계단에 가장 걸맞은 장식품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계단은 옛날에 오페라를 보러 온 귀족 여인들이 산처럼 부푼 드레스를 입은 채 난간에 서서 머리를 빗던 곳으로 그 자체가 하나의 구경거리였다고 한다.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 천장화는 각기 다른 음악장르를 상징한다. 계단을 따라 1층으로 올라가면 300년 역사의 파리 오페라단에 관한 자료를 전시한 오페라 박물관 겸 도서관이 나온다. 도서관 옆에 딸린 특별 전시실에는 오페라 단원들이 입던 무대의상과 악보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객석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2층에 있다. 극장의 천장에는 샤갈이 그린 천장화와 그 아래에 매달린 대형 샹들리에가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이탈리아 양식을 본떠 말굽형으로 설계된 공연장에는 붉은 벨벳을 씌운 1,900개의 객석이 설치되어 있다. 공연장 앞에는 프와이예라고 부르는 관객 대기실이 규모와 특징에 따라 각각 다른 이름이 붙어있다. 객석 출입문 바로 앞의 아방 프와이예는 황금색 바탕에 화려한 색상으로 꾸민 모자이크가 둥근 지붕을 감싸고 있으며 규모가 가장 큰 그랑 프와이예는 마치 옛 성채의 미술관처럼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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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빠르나스

몽빠르나스 일대는 빠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몽빠르나스 타워와 현대적인 모습의 몽빠르나스 역을 중심으로 6구, 14구, 15구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크레프, 시드르 등 브르따뉴 전통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이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은 것이 특징이다. (생 제르맹 데 프레와 더불어 몽빠르나스 대로는 유명한 카페가 많기로 알려져 있다.) 피카소, 모딜리아니를 비롯한 화가들 외에 단위 면적당 영화관 수가 가장 많은 지역이라 영화계 종사자들이 자주 카페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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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요 궁전

 

M Trocadéro

트로까데로 정원 뒤에 병풍처럼 빙 둘러싼 모습으로 서 있는 샤이요 궁전은 에펠탑보다 약 40년 후에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지은 건물이다. 좌익관과 우익관의 두 채의 곡선 건물로 이루어진 샤이요 궁에는 각 익관마다 두 곳의 박물관이 있고 가운데에는 국립 샤이요 극장이 있다. 이 관보다 한 층 낮게 설계된 극장의 지붕부분은 정사각형의 마당으로 꾸며져 있어 트로까데로 정원과 에펠탑을 보려는 사람들과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그 앞의 테라스는 센느 강 남쪽의 멋진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이곳에서는 에펠탑과 군사학교 그리고 앵발리드의 번쩍이는 돔 성당이 모두 내려다보인다. 샤이요 궁 테라스 앞 계단참에서는 매일 롤러스케이트의 달인들이 모여 신기한 묘기를 보이고 아프리카에서 온 타악기 연주자들이 신명나는 리듬판을 벌여 샤이요 궁을 찾은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를 잠시 잊게 해주기도 한다. 샤이요 궁을 뒤로 하고 트로까데로 정원에 섰을 때 왼쪽이 좌익관이고 오른쪽이 우익관이다. 샤이요 궁의 좌익관에는 앙리 랑글루아 영화 박물관(Musée du Cinéma Henri Langlois) 과 국립 프랑스 역사 유적 박물관(Musée de National Monuments François)이 있다. 영화 박물관에는 또한 씨네마떼끄(Cinémathèque)라는 이름의 영화 관계 자료 보관소가 있어 영화학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우익관에는 인류박물관(Musée de l'Homme)과 해양박물관(Musée de la Marine)이 있다. 인류박물관에는 인류학, 고고학 등 선사시대 이후의 인류의 진화과정과 문명의 변천과정을 나타내는 다양한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사하라 사막에서 출토된 프레스코화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의 민속품과 라틴 아메리카의 아즈테크 문명과 마야 문명 등이 눈길을 끈다. 이 밖에 선사시대의 무기, 생활용품, 의복 등이 지역별로 전시되어 있다. 해양박물관에는 프랑스가 국제무대에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18세기에 신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러 떠날 때 탔던 선박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옛 선박과 프랑스 해군의 역사와 관련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해도와 항해에 필요한 도구, 바다를 주제로 한 회화작품 등을 관람할 수 있다.

 

빨레 르와이얄

리볼리 거리를 사이에 두고 루브르 박물관과 마주 보고 있는 빨레 르와이얄은 리슐리외 추기경(Cardinal Richelieu)의 관저 내 작은 극장으로 시작되었다.(17세기 당시 최초의 움직이는 무대 배경으로 유명했다.) 빨레 르와이얄 한쪽에는 1680년에 문을 연 유서 깊은 극장인 꼬메디 프랑세즈(La Comédie Française)가 있으며, 빨레 안으로 들어서면 기둥 장식이 있는 안마당이 나오고 그 뒤로 직사각형의 잘 다듬어진 17세기식 정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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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묘지

서울 변두리에 납골당 하나를 만드는데도 온 지역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땅값 떨어짐을 운운하며 피하려고 하는 우리나라 문화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지 모르지만 파리 안에는 곳곳에 공동묘지가 위치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공동묘지는 그저 묘지로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파리 시민들이 편안하게 산책하며 쉴 수 있도록 공원으로도 이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조차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도시의 어지러움에서 잠시 떠나 여유를 즐기고 싶을 때 묘지를 찾는다고 할 정도니 한국식 사고방식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멋진 곳임에는 틀림이 없다. 뿐만 아니라 사르트르, 사무엘 베케트, 에디뜨 피아프 등등 유명인들이 잠들어 있는 곳을 찾아보는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닐까. 파리 시내의 묘지는 대부분 공원식으로 설계되어 있고 유명인들이 잠들어 있는 묘지를 지도로 만들어 입구에 비치해 두고 있어서 관광객이 들어가 휴식을 취하며 돌아보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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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시 라 데팡스

 

파리를 오랜 기간 동안 구경하다 보면 서울의 높다란 건물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오래된 건물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그들의 집념이 훌륭하다 싶다가도 조금 지저분한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거나 히터나 에어컨이 별 소용이 없는 집에서 생활하다 보면 모던한 건물의 깔끔함이 그리워진다. 하지만 파리 시내만 둘러보고 프랑스라는 나라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면 큰 오산이다. 작은 파리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라 데팡스라는 매우 현대적인 신도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라 데팡스(La Défense)
루브르 박물관 앞의 까루젤 개선문, 샹젤리제의 개선문, 그리고 라 데팡스의 신개선문은 정확하게 일직선상 위에 놓여져 있어 파리의 도시계획이 얼마나 미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이곳은 개선문에서 서쪽으로 겨우 6㎞ 떨어져 있는 신도시로 파리 외곽에 위치해 있으나 매우 가깝게 느껴지는 오피스 타운 이다. 이곳에는 모던한 외관의 각종 아파트가 들어서 있기는 하지만 상주인구는 겨우 3만 명이며 대부분은 이곳의 모던한 건축물 오피스로 통근을 한다. 1970년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지금 이곳에는 프랑스의 주요 기업과 은행 본점, 그리고 유럽의 주요 기업들이 상주하고 있다. 이곳은 편리한 교통과 분주한 상업의 본거지, 그리고 각종 편의시설들로 사람들을 모아들이고 있다.

팔레 드 라 데팡스(Palais de la Défense)
라 데팡스에 있는 건물 중에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인 이것은 새로운 산업과 기술의 중심점으로 8만 ㎡에 이르는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정보 커뮤니케이션과 국제 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는 장소다.

레 꺄트르 떵(Les Quatre Temps)
사계를 의미하는 레 꺄트르 떵은 라 데팡스에서 가장 규모가 큰 쇼핑몰로 250개 이상의 숍이 입점하고 있다. 이 외에도 이곳에는 오샹(Auchan)이라는 대형 슈퍼마켓과 극장,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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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제르망 데 프레 성당

월~토 08:00~19:45, 일 09:00~20:00, 미사 09:00,10:00,11:00,17:00,19:00

다른 지역보다 6구에는 유별나게 성당이 많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생 제르망 데 프레 성당이다. 메로빙거 왕조 시대였던 서기 542년 클로비스 왕의 아들인 쉴드베르 왕이 예수가 못 박혔던 십자가의 일부를 포함한 성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이곳에 수도원을 지으면서 이 성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생 제르망이라는 이름은 당시 파리의 주교였던 생 제르마누스(Saint Germanus)의 이름을 딴 것이며 프레(Près)는 이름 없는 풀밭이라는 뜻으로 ‘풀밭의 성 제르마누스 성당’이라는 뜻이다. 메로빙거 왕조가 끝날 때까지 이 성당은 건립자인 쉴드베르 왕을 비롯한 메로빙거 왕가의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8세기 들어 가톨릭 수도회 중의 하나인 베네딕트파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이로부터 프랑스에서 가장 강력한 수도회가 되어 후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가톨릭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노르망디인들의 약탈로 인하여 파괴된 성당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재건한 것은 11세기를 전후해서였다. 중세의 건축 양식이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손꼽히는 이 성당은 12세기에 건축을 시작한 노트르담 대성당과 함께 파리에서 가장 유명하고 세력이 강한 성당으로 한때 교황과 파리 주교의 세력이 대립되던 현장이었다. 고딕식의 노트르담 대성당과 비교되는 11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인 이 성당의 겉모습은 화려하거나 웅장하다는 느낌 대신 강건한 요새와 같은 느낌을 준다. 현재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종탑도 이 시기에 지어진 것이다. 성당 내부는 오랜 세월에 걸쳐 증·개축을 한 흔적이 남아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6세기에 지어진 대리석 기둥에서부터 로마네스크, 고딕 양식이 어우러진 다양한 실내장식이 인상적이다. 성당 내 기도실에서는 6~11세기의 종교 예술품이 다수 발굴된 바 있으며 베네딕트파의 한 분파인 끌뤼니 수도회 수도사들이 남긴 고문서, 채색 장서 등은 중세 미술관과 프랑스 학술원에 보관 중이다. 이곳에는 또 유명 인사들이 많이 잠들어 있는데 그중 제단 오른쪽에는 철학자 데카르트가, 성당 중앙회랑 왼쪽에는 폴란드의 왕이었으며 나중에 생 제르망 데 프레 수도원장이 된 요한 카시미르가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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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쉴피스 성당

M Saint Sulpice, Mabillon
07:30~19:30

뤽상부르그 공원(Jardin du Luxembourg) 옆의 조용한 골목길을 걸어가면 넓은 광장이 나오고 그 옆으로 두 개의 종탑을 거느린 거대한 생 쉴피스 성당이 나타난다. 길 건너편의 생 제르망 지역에 살던 가난한 농민들의 교구 성당으로 지은 것이지만 주교자 성당인 생 제르망 데 프레 성당보다 훨씬 큰 규모를 갖추고 있다. 6세기의 대주교였던 생 쉴피스에게 봉헌한 데서 이 이름을 얻게 되었다. 1646년에 제단 오른쪽의 성단소를 보수하면서 시작된 재건축은 무려 134년이나 걸린 끝에 완성되었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듯 한 기둥과 아치를 넣어 완성한 정면은 피렌체 출신의 건축가가 설계한 것으로 정면 좌우에 두 개의 거대한 종탑이 올라가 있다. 우아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주는 기둥을 지나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그 어느 성당보다 넓은 실내가 사람들을 압도하는 듯하다. 날씨가 좋을 때 거대한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성당 내부를 환하면서도 엄숙하게 밝혀준다. 이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862년에 설치한 파이프 오르간으로 프랑스에서 가장 크고 가장 훌륭하다는 평을 듣는다. 이 성당 소속의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는 음악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뛰어난 음악가만 맡을 수 있는 영예로운 자리다. 매주 화요일마다 열리는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는 생 쉴피스를 유명하게 만든 가장 큰 요인이다. 성당 앞에 펼쳐진 생 쉴피스 광장은 성당보다 훨씬 작으나 단정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사각형의 광장 둘레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고 한가운데에는 분수가 있다. 이 분수는 1844년에 제작한 것으로 ‘네 명의 추기경 지명자의 분수(Fontaine des Quatres Points Cardinaux)’라는 긴 이름이 붙어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나중에 추기경이 된 사람은 없다고 한다. 옛날에 이 부근의 상점에서 파는 상품들은 조악한 것으로 유명하여 생 쉴피스 하면 싸구려라는 뜻으로 통하던 때가 있었으나 지금은 생 제르망 데 프레 지역과 연결되는 고급스러운 카페와 상점들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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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뜨 샤펠 성당

M Cité
하절기 09:30~18:00, 동절기 09:00~17:00
5월1일, 12월 25일
입장료:성인 8유로, 할인 5유로, 18세 이하 무료

프랑스의 대표적인 중세 미술인 스테인드글라스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다. 대법원의 안쪽에 자리 잡은 이 아름다운 고딕식 기도 성당은 십자군 원정으로 나중에 성인이 된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1298년에 시떼 섬에 있던 당시의 궁전 안에 축성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과 성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위층은 수도사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위층의 둥근 장미의 창과 15개로 이루어진 높은 창문에는 고딕 예술의 꽃이라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이 되어 있다. 현대의 기술로도 이곳의 아름다운 푸른색은 재현해 내기 어렵다고 할 만큼 독특한 아름다움이 눈길을 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은 햇빛이 창문을 투과하면서 창에 칠해진 색색의 투명한 빛을 실내로 비추는 데 있으므로 흐린 날에는 그 영롱한 빛을 감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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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레

빠리 시청 뒤에서 바스띠유에 이르는 일대를 ‘마레’라고 한다.(‘습지’란 뜻의 마레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옛날 이 지역이 장마 때만 되면 세느 강물이 범람하여 습지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라고.)앙리 4세 때부터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진 마레는 현재는 유대인, 게이, 독립 예술가들이 뿜어내는 독특한 매력으로 가득하다. 마레에는 피카소 미술관, 꺄르나발레 박물관, 유럽 사진 박물관을 비롯해 각국의 문화원과 개인 박물관이 골목마다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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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 시청

M1, 11 Hôtel de Ville

 

빠리 시 행정의 중심인 빠리 시청은 마레 남쪽 세느 강변에 우뚝 서 있다. (1553년부터 1628년 사이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빠리 시청은 19세기 초반과 중반 두 차례에 걸친 확장공사를 거쳐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거대하고 화려한 본채 위로 보라색 지붕을 인 시청 건물은 빠리를 빛낸 108명의 유명인사와 프랑스의 대표적인 30개 도시를 상징하는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중앙의 시계탑은 세느 강을 상징하는 여신상으로 장식되어 있다.(시청 내부는 화려한 제3 제정시대 양식으로 꾸며졌으며 수많은 천장화와 스테인드글라스, 샹들리에가 화려함을 더해준다.) 빠리 시에서 주최하는 대형 행사가 열리는 ‘축제의 방(Salle des Fêtes)’, 화려한 계단 등이 특히 눈길을 끈다.(일반인은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 30분 가이드 투어를 통해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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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마르땡 운하

M5 Jacques Bonsergent

영화 ‘아멜리에(Le Fabuleux Destin d'Amélie Poulain)’에서 주인공이 물수제비를 던지던 곳이 바로 생 마르땡 운하이다. (레퓌블리끄 광장에서 동역에 이르는 지역에 부메랑 모양으로 조성된 생 마르땡 운하는 전체 길이가 4.5㎞이지만 지하에 숨어 있는 부분이 많아 실제 산책하기에는 그리 긴 거리가 아니다.) 산책로 군데군데에 서민적이고 유쾌한 카페가 많아 다리쉼 하기에도 좋다. 위치 메트로에서 나와 뤼시앙 상뻬(Rue Lucien Sampaix)거리 끝까지 가면 되지만 운하의 모습을 차근차근 보려면 바스띠유 광장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광장에서 서북쪽으로 난 리샤르 르느와르 대로(Boulevard Richard Lenoir)와 이어진 쥘 페리 대로(Boulevard Jules Ferry)를 지나면 운하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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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코르드 광장

메트로폴리탄 한복판에 그렇게 넓은 광장을 조성할 수 있는 프랑스인들의 배짱이 놀랍게 느껴지는 콩코르드 광장은 아름다운 가로수 길로 유명한 샹젤리제 대로를 사이에 두고 에뜨왈 광장과 마주보고 있다. 규모면에서나 뛰어난 조경양식에 있어서나 유럽 최고의 광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뛸르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 안에 조성된 이 광장은 사방이 시원하게 트여있어 파리의 주요 기념물들을 모두 한 자리에서 바라볼 수 있다. 1753년 루이 15세 때 자끄 앙쥬 가브리엘이 설계하고 1755년부터 1775년까지 장장 20여년에 걸쳐 조성된 이 광장은 프랑스 역사의 생생한 현장으로 프랑스 대혁명 때 단두대인 기요틴이 설치되어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넣기도 했다. 당시 이 부근은 사람들의 인적이 끊겨 으스스할 정도였다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목이 잘린 곳도 바로 이곳이다. 단두대가 있던 자리에는 1831년에 이집트의 총독이 샤를 10세에게 선물했다는, 만들어진 지 무려 3,000년이 넘는 거대한 뤽소르의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높이 23m에 220t이 넘는 이 오벨리스크는 유럽으로 옮겨온 이집트의 유적 중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벨리스크의 남북 쪽에는 두 개의 화려한 분수가 설치되어 있으며 분수 둘레의 여덟 조각상은 프랑스의 여덟 개 주요 도시를 상징한다. 광장 오른쪽에는 장엄하게 기둥으로 장식된 거대한 건물이 두 채 늘어서 있는데 유명한 크리용 호텔과 프랑스 해양부 및 자동차 클럽으로 사용된다. 콩코르드 광장은 개선문까지 이어지는 샹젤리제 대로의 시발점이며 이곳을 사이에 두고 비슷한 정면 장식이 눈을 끄는 마들렌느 성당과 강남 쪽의 국회의사당이 마주보고 서 있다. 이곳에서는 매해 프랑스 혁명기념일에 시민 대행진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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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쥬 광장

M1 Saint Paul

빠리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라는 보쥬 광장. 광장 가운데에는 루이 13세의 동상이 서 있으며, 주랑으로 이루어진 건물 아래층은 소규모 화랑, 디자이너 부티크, 골동품점, 분위기 있는 카페가 가득하다. 이 광장은 17세기 초반 앙리 4세가 조성한 것으로 루이 13세의 결혼식이 거행되기도 했다.(광장 북쪽 건물은 왕비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맞은편 남쪽에는 왕의 거처가 있었다.) 
빠리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라는 보쥬 광장. 광장 가운데에는 루이 13세의 동상이 서 있으며, 주랑으로 이루어진 건물 아래층은 소규모 화랑, 디자이너 부티크, 골동품점, 분위기 있는 카페가 가득하다. 이 광장은 17세기 초반 앙리 4세가 조성한 것으로 루이 13세의 결혼식이 거행되기도 했다.(광장 북쪽 건물은 왕비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맞은편 남쪽에는 왕의 거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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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외스따슈 성당

포룸 데 알 바로 위에 자리잡은 생 외스따슈는 1532년부터 약 100여 년에 걸쳐 지어진 성당으로 길이 105m, 폭 43m에 달하는 거대한 성당이다. 고딕 양식의 화려하고 엄정한 이 성당의 외부는 기둥과 아치로 마감되어 있으며, 내부는 고딕을 기본으로 하여 르네상스 장식을 부분적으로 가미한 형식이다. (이 성당은 몰리에르(Molière), 리슐리외(Richelieu),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뽕빠두르 후작부인(Marquise de Pompadour) 등 프랑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유명인사들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생 외스따슈 성당을 더욱 유명하게 한 것은 파이프 오르간으로, 19세기의 대표적 음악가인 베를리오즈(Berlioz)가 미사곡을 지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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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 생 미셸 수도원

몽 생 미셸의 기원은 아브랑슈의 대주교 오베르가 이 바위산에 대천사 미카엘을 모시는 성소로 지은 서기 7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0세기경 베네딕트 수도원이 되면서 사하촌이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영국과의 100년 전쟁 때는 난공불락의 요새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혁명이 발발한 1789년부터 1863년까지 수도원은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가 1874년에 역사 유적으로 지정되어 훼손된 부분을 복원하게 되었다.) 중세 사람들이 생각한 천국의 모습을 한 몽 생 미셸은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몽 생 미셸 수도원은 단 하나의 건물 안에 모든 부속시설이 들어있는 형태로 이런 식으로 지어진 수도원은 오직 몽 생 미셸뿐이라고 한다. 피라미드 형 바위산의 형태를 그대로 살리면서 수도원을 짓기 위해 화강암 암벽을 돌아가며 감싸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묘지는 기반 역할을 하고 그 위로 뾰족한 성당을 쌓아올리고 맨 꼭대기에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린 대천사 미카엘 상을 올려 더욱 날렵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수도원은 3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래층, 위층, 중간층의 순서로 관람한다. 매표소에 비치된 안내 자료를 참고하여 순서대로 방문하는 것도 좋지만 매일 오후 한 차례씩 실시되는 가이드 투어에 참석하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어 더욱 편리하다. 8세기에 수도원이 설립된 후 250여 년 동안 수많은 해적들의 침략을 거치면서 수도사들의 태도도 해이해져 교리에 따른 금욕적인 생활을 팽개치고 세속의 욕망을 따르는 경향을 띠게 되자 노르망디 공 리샤르 1세가 엄격한 종교 윤리를 요구하게 되었다. 수도사들의 거부로 리샤르 1세는 교황 13세와 함께 기존의 수도사들을 모두 내쫓고 30여 명의 베네딕트파 수도사들을 초빙하여 영적이고 지적인 수도원을 다시 세우게 되었는데 오늘날의 몽 생 미셸 모습이 본격적으로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다. 1017년 노르망디 공 리샤르 2세는 몽 생 미셸 수도원을 더욱 화려하게 확장하여 사방 어디서든 수도원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암벽 위에 뾰족한 형태의 수도원 성당을 건축하게 하였다. 이 시기에 완공된 수도원 성당은 높이와 바닥면의 길이가 모두 80m로 아치와 회랑, 창문 등 3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도원 건물을 지탱할 수 있도록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기둥을 세웠으나 100년 전쟁 때 파괴된 후 1421년에 플랑브와이양 고딕 양식으로 다시 지었다. 성당 밖으로 나가면 아름다운 회랑이 나오는데 기둥으로 둘러싸인 안쪽 마당은 갖가지 채소와 약초를 재배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으며 회랑은 수도사들이 명상과 기도를 하던 곳이었다. 회랑 바로 아래쪽에 13세기에 지어진 건물은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경이(La Merveille)’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수도원 건축의 보석이라고도 하는 이곳은 화강암 암벽 위에 3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는 식당, 주방, 요사 등 수도사들의 일상생활을 위한 공간과 성당, 기도소가 있으며 수많은 계단이 층간을 연결하도록 되어 있다.
식당(Réfectoire) 한쪽 벽면에는 작은 제단이 있어 수도사들이 모두 침묵 속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한 명의 수도사가 성경을 낭독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반원형의 둥근 나무천장과 어두침침한 무거움이 주는 엄숙한 느낌이 인상적이다. 한 층 아래에는 접견실과 15세기 중반에 지어진 묘소가 마련되어 있다. 그 옆의 생 마르탱 묘지는 직경 9m의 거대한 궁륭형 천장으로 유명하며 그 옆으로 수도사들의 유골을 모신 납골당이 자리 잡고 있다. 납골당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있는 거대한 나무바퀴는 1820년에 설치된 것으로 당시 감옥으로 사용되던 수도원에 갇혀있던 죄수들로 하여금 돌리게 했던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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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다리, 퐁 데 자르

시떼 섬의 뾰족한 끝부분 앞의 이 아름다운 철제 인도교는 센느 강 북쪽의 루브르 박물관과 남쪽의 프랑스 학술원을 연결한다. 1804년에 처음 세워졌으나 1985년에 보수공사를 실시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짙은 녹색의 철제 난간과 나무 바닥이 독특한 멋을 풍기는 이 다리는 부근에 국립 미술학교가 있어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 차가 다니지 않는 다리기 때문에 이곳은 시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약속 장소로 애용되며 날씨가 좋을 때는 거리의 악사, 팬터마임 예술가, 아마추어 마술사 등이 찾아와 길 가는 시민들에게 유쾌한 공연을 선사한다. 특히 예술의 다리답게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자신이 그린 그림을 파는 가난한 무명 화가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특히 이곳에서는 영화로 더욱 유명해진 퐁 네프와 그 아래로 보이는 뾰족한 공원이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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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 네프

줄리엣 비노쉬와 드니 라방이 주연한 영화 ‘퐁 네프의 연인들(Les Amants de Pont Neuf)’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이 다리는 현존하는 센느 강의 다리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다리 중 하나다. 1578년 앙리 3세 때 짓기 시작하여 앙리 4세 때인 1604년에 완공된 이 다리는 석조로 된 12개의 아치가 떠받치고 있으며 예술의 다리(Pont des Arts)에서 바라볼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시떼 섬을 중앙에 두고 센느 강의 북단과 남단을 연결하는 이 다리는 옛날부터 유난히 예술가들이 많이 몰려들어 미술이나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했다. 지금도 이 다리 위에서 연주를 하는 거리의 음악가와 단편영화를 찍는 젊은 영화학도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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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 시립 현대 미술관

메트로 : 9호선 이에나(Iéna) 역 하차 RER C선 Pont de I’Alma | 버스:32, 42, 72, 80, 82, 92번
10:00~18:00(화~일), 특별전시회의 경우 10:00~22:00(화~일)
월, 공휴일
입장료 : 무료, 특별전시관 작가 및 작품에 따라 다름
패스:적용 | 사진촬영:플래시 없이 가능

 

미술관 소개
샤이요 궁에서 알마 교 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강변에 세워진 거대한 현대식 건물이 눈길을 끈다. 샤이요 궁과 더불어 1937년의 빠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여 지은 이 건물에는 “토쿄 궁전”이란 뜻의 “빨레 드 토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 건물은 앙뜨완느 부르델의 부조 ‘라 프랑스(La France)’ 시리즈가 장식되어 있는 것으로 더욱 유명하다. 건물의 오른쪽에는 시립미술관이, 규모가 작은 왼쪽은 시네마떼끄의 별관이 자리잡고 있다. 두 건물은 주랑 복도로 이어져 있으며, 세느 강 풍경을 감상하기에 좋은 곳이다. 빠리 시립현대미술관은 야수파, 입체파 등 20세기 초반 서양 미술계의 대표적인 화파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곳으로, 뽕삐두 센터 다음으로 규모가 큰 곳이다. 대표적인 야수파 작가인 마띠스(Matisse)의 ‘춤(La Danse, 1930)’과 1937년에 제작한 뒤피(Dufy)의 ‘전기의 요정(La Fée Eléctricité)’이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마띠스의 ‘춤’ 시리즈는 전시장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의 초대형 작품으로, 생동감 있는 인체의 움직임을 극도로 단순하게 묘사한 과슈 작품이다. ‘전기의 요정’이란 벽화는 단일 회화로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이 밖에 피카소, 브라끄, 루오 등 입체파의 작품과 20세기 초반에 빠리에서 활동했던 빠리 화파의 작가들, 즉 샤갈, 모딜리아니 등의 작품이 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등장한 초현실주의와 추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있다. 이 미술관에서 한국인들의 눈길을 끄는 작품으로는 우리나라 출신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 ‘매춘부들의 올림푸스(Olympe de Gouges, 1989)’이다. 

부대시설 & 주변까페
입구에 헌책방을 겸한 미술서점이 있다. 박물관에서 자체적으로 발간하는 도서는 없으나 현대 미술가들의 개인별 화집과 작품 설명서를 비롯하여 미술이론서, 미술 관련 문학작품 등 다양한 도서가 전시, 판매되고 있다. 헌책을 고르면 싼 가격에 훌륭한 이론서를 구입할 수 있다.

주변 볼거리
고급 패션가인 몽떼뉴 대로와 조르쥬 생끄 대로가 만나는 알마 광장과 남쪽의 오르세 강변을 이어주는 알마 교(Pont de l'Alma)는 다른 세느 강의 다리에 비해 큰 특징이 없었으나 다이애너 전 영국 왕세자빈이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이후 유명해졌다. 세느 강 물결로 부식된 곳을 1972년에 보수한 알마 교는 비대칭적인 구조를 하고 있으며, 강수량을 표시하는 눈금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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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뜰레 레알

이 지역은 시립극장과 샤뜰레 극장이 있는 샤뜰레 광장(Place du Châtelet)과, 종합상가인 포룸 데 알(Forum des Halles)로 구분된다.(에밀 졸라가 ‘빠리의 배’라고 일컬은 레알 지구는 원래 재래시장이 있던 곳이나 도시 위생을 감안하여 1963년 교외로 시장을 옮기고 대신 현대식 대형 상가를 조성하게 되었다.) 레알에 본격적인 현대식 상업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인 1851년 나폴레옹 3세 (Napoléon III) 시대부터이다. 20세기 들어 인구 증가와 도시 팽창으로 인한 상업지구의 필요성이 확대되자 뽕삐두 대통령 시절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고 신도시 개념의 초현대식 상가인 포룸 데 알을 조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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뤽상부르그 공원

사각형과 팔각형의 기하학적 설계를 바탕으로 한 전형적인 프랑스식 정원. 파리 시민들이 가장 편안하게 다녀가는 공원으로 마치 야외 미술관처럼 느껴지는 조경이 아름답다. 공원 중앙에 있는 넓은 분수대는 이곳의 자랑거리로 여름이 되면 이 근처의 벤치에 누워 선탠을 즐기거나 분수 속에 들어가 물놀이를 즐기는 젊은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특히 입구에서 호수를 향해 가다가 계단 위 오른쪽에 세워진 동상은 파리를 야만족으로부터 지켜낸 이 도시의 수호성인인 성녀 주느비에브(Sainte Geneviève)를 조각한 것이다. 17세기에 조성된 이후 파리 시민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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뛸르리 공원

루브르 박물관과 뛸르리 궁전 사이에 있는 대형 정원으로 뛸르리 궁전은 1871년 파리 꼬뮌 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미술관만 남아있는 상태다. 17세기의 왕실 정원사 앙드레 르 노트르(André le Notre)가 설계한 이 정원의 가장자리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고 팔각형의 인공 호수가 중앙을 장식하고 있다. 1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 들어가면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날 수 있다. 루브르를 구경하기 위해 온 관광객들, 근처 회사의 직장인, 조랑말을 타고 있는 사람들, 회전목마 등 여유로운 한때를 즐기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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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일루존
글쓴이 : 더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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